역사와 인문학

얼리터우二里頭, 대륙 先史와 역사시대 경계선

다음족 2024. 5. 31.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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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리터우 궁전

얼리터우는 대륙 최초 청동기 遺址다. 물론 1, 2기까지는 아직 신석기시대로 3, 4기부터 본격 청동기가 나타나고 왕궁이 세워지며 도시 국가로 발전했다. 얼리터우의 거시상 연대는 기원전 21세기부터 16세기까지지만 탄소연대측정법에 따른 연대는 편차가 너무 크다. 미시상 연대는 1기는 대략 기원전 1900년 전후, 2기는 기원전 18세기 전후, 3기는 기원전 17세기 전후, 4기는 기원전 16세기 전후로 나뉜다

오늘날 夏 왕조가 부정됨에 따라 얼리터우 말기를 商代 개국 初 도읍으로 매듭짓고 싶었으나 최근 학계에서 유행하는, 중국 리숴 박사의 상나라 정벌(翦商)로 인해 지금까지 내 견해가 뒤집혀버렸다. 여태껏 얼리터우에 대해서는 막연히 연대와 간략한 연대별 특징만을 알았으나 이 책 덕분에 얼리터우 세부 내용과 얼리터우가 도읍으로 알려진 夏 왕조가 실제로는 어떻게 명맥을 이었을지까지 파악되었다
물론 리숴 박사는 원래 魏晋南北朝 시대 전문가라 어느 정도는 걸러들어야 한다. 대신 그가 서술한 얼리터우 연대기는 참 신선하게 느껴졌다



夏 왕조는 틀림없이 실존하지 않았다. 商代 갑골문에는 夏자조차 없었으니(당대에는 한 해를 春과 秋로만 불렀음이 이미 학계의 정설이다) 그 전대 나라 또는 부락 이름을 夏로 정했을 리 만무하며(문자조차 없었다) 얼리터우를 대개 夏代 遺址라고 하는데 고서에 기록된 夏 왕조 시조 禹의 도읍 安邑은 山西에 있지만 얼리터우는 허난 옌스가 중심이다. 夏 왕조와 禹의 기록 또한 고문헌과 銘文으로도 周代부터 나타나며 夏 왕조에 대해서 문헌상 첫 기록은 한 줄만 보이고 禹의 기록에도 夏 왕조는 원래 따로 떨어졌었는데 나중에 따라붙었다
그러나 대륙 역사에서 얼리터우는 절대 간과할 수 없다. 사실 夏代가 누락되면 대륙 역사에서 先史시대와 역사시대 사이 간격이 너무 벌어진다. 따라서 夏 왕조가 실존하지 않았더라도 당대에 가장 발달했던 도시국가는 실존했다. 얼리터우 시대를 비록 왕조라고까지 할 수도 없지만 얼리터우를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대륙 역사의 첫 장을 설명할 수 없다

얼리터우 말기 최상층 유적에는 대규모 충돌의 흔적이 뚜렷이 남았으며 따라서 夏 문화로 흔히 알려진 얼리터우와, 商 문화라고 하는 얼리강二里崗 유형 토기 사이에는 교체된 흔적이 나타난다. 夏 문화 얼리터우와, 商 문화의 기본 틀은 다르다
그 얼리터우를 점령한 후보는 商族 밖에 없다. 商代 창업의 主 成湯의 도읍 亳은 얼리터우 말대가 아니라 얼리터우에서 동쪽으로 떨어진 옌스 商城(고서상 尸鄕)인 것 같다. 정저우에도 商城이 하나 더 있으나 이곳은 옌스 유적보다 더 발전한 모습을 보여 중기 도읍, 中丁 시대 도읍인 듯하다(고서상의 隞).
얼리터우 말대는 商代 개국 初와도 겹치는데 成湯이 얼리터우를 점령하고 옌스 商城을 세우기 전의 임시 도읍이었을 수도 있고(중국 夏왕조에 대한 간략한 이해 인용), 大甲이 감금되었다고 전해지는 별궁 桐宮이었을 수도 있다
얼리터우는 商族에 삼켜지고 나서도 독자의 토기를 생산하며 명맥을 유지했으나 점점 얼리강 商 문화에 의해 쇠퇴하다가 침식되었다. 다만 얼리터우와 얼리강의 二里란 명칭은 그대로듯(현대 학계에서 옌스에서 본떠 명명했지만) 발굴 결과 얼리강 유형 토기와 청동기는 얼리터우를 계승했다. 따라서 얼리터우는 대륙 전근대 왕조 문명의 젖줄이 된다. 成湯은 얼리터우를 점령하고 그것을 참고해 商代 첫 도읍을 건설한 것 같다


얼리터우 궁궐 청동 작업장은 따로 담장에 둘러싸여 격리되었다. 상나라 정벌에 의하면 이는, 얼리터우 귀족층에게 청동 수공업자들은 귀속되지 않고 그들과 분화되어 공존했던 것 같다. 얼리터우 귀족층은 청동 수공업자들로부터 나온 청동기를 독점하여 권력을 농단했고 이에 청동 수공업자들은 동방 商族과 밀회하며 그들에게 자잘한 청동 기술을 유출시켰고, 大乙(商朝 창업의 主 唐)이 商族 대표가 되자 方族들과 연합해 얼리터우를 쳤다. 그리고 商朝를 창업했다
얼리터우 시대(夏代로 가정되는)에는 얼리터우 유형의 토기만이 지배적이다가 商代로 넘어가면 여러 문화권 유형 토기가 보인다. 이 고고자료를 고문헌에 비춰보면 成湯이 商 왕조를 창업하면서 제후의 추대를 받았다고 하는데, 얼리터우 시대에는 고서에 夏 왕실이 東夷 有窮 대표 后羿에게 나라를 빼앗긴 적 있다는 기록이 보이듯 외부 문화권에 폐쇄되었고 청동 기술을 공유하지 않았다. 따라서 夏代에는 아직까지 봉건 제후가 없었다
그러나 商代는, 方族들과 연합해 얼리터우를 접수했듯 외부 문화권에 개방되어서 全代에 걸쳐 복합된 문화 양상이 보이고 方國들과도 청동기를 공유하고 그들에게 청동품을 하사했다. 따라서 湯은 商族 우방들의 자치권을 인정해 프로토 봉건제를 마련했고, 周代에 완전한 봉건제로 이어졌다. 그리고 얼리터우에 대해서는 고서에 夏 왕실 종친이 제후로 봉해졌다는 기록이 있듯 청동 수공업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잠시나마 제자리를 보장해 얼리터우 古城에 청동기 작업장을 둔 것 같다(옌스 商城에는 창고가 즐비했고 정저우 商城으로부터 商 王都 안에도 청동기 제련소 및 작업장이 즐비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夏代(얼리터우) 멸망기는 桀의 폭정 같은 것이 아니라 왕실(귀족층)이 청동 수공업자들로부터 나온 청동품을 독점해 권력을 독차지했기 때문이다. 이를 후대 문헌에서는 末王이 폭군이었다고 전하는데 이는 제후와 臣権 입장에서 역사가 쓰였기 때문에 그들을 억압한 군주들을 깎아내릴 수밖에 없었다. 史記 殷本紀에도 大乙, 大戊, 般庚, 武丁 등처럼 흥성기 왕에게 제후들이 덕을 칭송했다고 쓰였고 大甲, 祖甲, 武乙, 帝乙, 帝辛과 같이 쇠퇴기 또는 황음무도했다고 전해지는 왕들이 그 희생양일 것이다
商代 갑골문에는 왕조 창업주 成湯의 공적에 대한 기록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얼리터우(夏代)로 보이는 강적 기록은 없다. 중국 夏王朝에 대한 간략한 이해에 의하면 履癸(夏桀) 시대에 珉山國을 정벌하다가 商湯에게 급습을 당해 夏 왕조가 멸망했고 商代 왕실이 天命이란 명분을 위해 履癸 왕을 폭군으로 매도했을 것이라고 하는데 天命은 周代부터 거론되었고 商族의 급습 또한 商代 멸망기를 베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갑골문은 商王과 왕실 제사 및 일상 기록이기에 굳이 얼리터우를 언급할 이유도 없었던 듯하고 딱히 商 왕실의 관심 대상도 아니었던 것 같다
https://shanghaicrab.tistory.com/m/16154096 참조

하(夏)왕조의 역사와 고고학의 곤경

글: 민간문화망 이리두(二里頭)등 "선상(先商)"유적지의 출토로 <사기>에 기록된 중국최초의 왕조 - 하왕조에 대한 논쟁이 날로 뜨거워지고 있다. 비록 이 논쟁은 이미 반세기동안 지속되었지만,

shanghaicrab.tistory.com

실제로 夏商 교체기는 易姓 혁명이 아니라 族群들끼리 쟁권이지 義를 위한 정벌 따위가 아니다. 尚書에는 湯이 천자가 되고 夏桀을 끌어내린 것을 부끄러워했다고 했으나 고고자료로 당대를 재구성하면 商族의 나라를 건국하는 데는 당연히 얼리터우를 접수해야 했다


얼리터우는 다른 신석기시대 도시국가들과 달리 약 500년을 영위했다. 이는 지배층의 청동기 덕분이었을 터인데 1, 2기까지는 陶製와 석기가 지배적으로 아직까지 청동기는 희귀했다. 허난성에서는 구리를 자체로 보급할 수 없었다. 그러나 2기부터 山西까지 영향권이 확대되어(둥샤펑) 그곳에서 구리를 확보했고 3기와 4기에 이르러서는 귀족층이 청동품을 독점해 마침내 왕조의 자격마저 갖추었다. 비록 商周 양대와 같은 왕조까지는 못 미쳤으나 얼리터우는 대륙 역사의 여명기를 개척했다
얼리터우 청동기 鼎은 왕권 상징이 되었고 爵은 제후에게 주어져 爵位란 호칭이 마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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