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商史 6

商代 先王 가족 관계

갑골 四堂 두 번째 観堂 왕궈웨이에 의하면 商代에는 적장자 왕위 계승법이 없었다. 이는 史記 殷本紀에 의거했고 四堂 세 번째 둥쭤빈도 이에 따라 商代 先公先王 계보를 정리했다. 비록 전래 문헌 기록이 갑골문과 고고자료가 발굴됨에 따라 신뢰도가 인정되어 上古史가 고고자료로만으로는 증명될 수 없고 고문헌과 교차 검증해야 하지만 고문헌 오류는 끊임없이 지적된다. 商代 제례 갑골에서 先王 가족 관계는 일일이 언급되지가 않았지만 제례 순서를 고문헌과 대조함으로써 유추되었다. 따라서 고문헌도 중요하지만 1차 사료 갑골문이 우선이 되어야 할 것이다 大示(직계) 및 준 직계는 전기에는 大, 中, 小(商代 諡法이 오늘날 중국에서 사람을 나이에 따라 大, 中, 小로 구분하는 연원이 되었다), 祖, 報, 示, 上, 下 등으..

역사와 인문학 2024.07.28

商代 先公 고찰

商代 일상은 제사였다. 商王은 제사장으로서 왕조 先王과 왕실 조상, 자연의 岳과 河 등 그리고 그들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절대신 帝에 제사를 올렸다 商族 대표는 왕조 先王과 先商 시대(왕조 전) 先公으로 나뉜다. 先王들과 혈연이 직접 연결되는 六示(上甲으로부터 여섯 先公)와 달리 遠祖先公 夔(또는 夒), 兕, 土, 季, 王亥, 王恆은 商 왕실과 혈연관계가 없으며 연맹 씨족들 신앙을 가져온 데 그치는 데서 훗날 제례에서 삭제되었다. 더욱이 이들 先公은 전래 문헌에서 전해지는 순서처럼 제사 순서도 따로 없다 夒 또는 夔는 商代 元祖 帝喾의 원형이고, 兕는 코뿔소기도 하지만 商族 시조 契의 원형이라고도 한다. 이는 갑골 四堂 세 번째 위치한 둥쭤빈董作賓이 처음에 고증했으나 발음만 호환될 뿐으로, 戛(로도 불린다..

역사와 인문학 2024.07.23

武丁의 중흥

武丁은 商 후기(殷商 시대) 중흥의 祖로 商代가 당시 기울어진 것을 크게 바로잡고 전성기를 이루어내어 高宗이란 존호로 유명하다. 전래 문헌에도 그의 시대에 천하가 기뻐했다고 기록되었고 은허 갑골문 절대다수도 그의 시대 것이며 갑골문에도 武丁 시대에 활발했던 군사 활동이 자주 기록되었다. 41세에 즉위해 59년 동안 재위했고 사방으로 商 왕조의 영토를 확장하고 나라 안에서는 사회를 개혁해 後王들의 혁명에 영감이 되었다 商代는 초기 大甲 시대부터 王弟와 王子가 번갈아가며 즉위해 왕위 다툼으로 5번이나 천도를 할 만큼 왕실 정국이 어지러웠다. 9대 中丁이 오늘날 정저우 商城에 도읍을 정하면서 그 첫 단추가 끼워졌고 그로 인해 東夷의 위협이 계속되고 우방 方族들마저 商 왕실 질서에서 이탈했다. 그러던 것이 18..

역사와 인문학 2024.06.16

성탕成湯, 전근대 왕조 문명의 開祖

成湯은 대륙 역사상 공인된 최초 국가 商 왕조의 창업주다. 전래 문헌에서 湯의 시호는 天乙인데 商代 갑골문에서는 大乙(大에서 天으로 와전되었을 것이다), 成과 唐(商代에는 따로 불렸다가 周代부터 합쳐져 불렸고 唐은 湯으로 와전됨), 咸, 高祖乙로 불린다. 한때 湯이란 왕의 치적이 갑골문에서는 번성기 祖로 기록되었다는 학계 견해를 믿고 商代 개국 시조를 大乙의 六代祖 上甲으로 앞당기고 싶어 했던 적이 있으나 이는 무리가 매우 크며 전래 문헌에서 전해지듯이 갑골 제례와 맞추어도 成湯이 商代 개국 시조가 맞는 것 같다 이번 글은 먼저 이에 대해 전제를 두면서 시작한다 갑골 卜辞에는 을미일에 上甲에서부터 祖乙과 羌甲에 이르기까지 제사를 올린 기록이 있는데 제수품이 上甲에게는 10개가 바쳐졌지만 報乙부터 示癸까지..

역사와 인문학 2024.02.07

帝辛, 사실 성군으로 치켜져 마땅한 마지막 商王

帝辛은 商代 末王으로 역사에 흔히 紂라는 불명예스러운 시호로 잘 알려졌다 역사에 기록된 그의 악행은 다음과 같다. 紂는 키가 크고 완력이 세어 맹수를 맨손으로 때려눕혔고 총명하여 모든 잘못을 언변으로 가릴 수 있었는데 그는 그 재주를 과신하여 세상 모든 이들이 노예인 줄 알았고 귀신마저 깔아 내리고 제사를 게을리하였다 백성들 고혈을 짜내어 鹿台에 세상 재물을 쌓는 한편 妲己란 여자와 함께 酒池肉林으로 향락을 즐겼고 炮烙의 刑을 보여 자기에게 反하는 백성들을 괴롭혔다 그리고 飛廉-悪来 父子와 같은 간악한 이들을 곁에 두고 微子啓와 箕子 같은 현인들을 멀리하고 끝내는 현인 比干이 충언을 하자 그의 심장을 갈랐다. 그의 폭정으로 천하가 신음하자 周 武王이 일어나 紂를 벌하고 백성들을 구했다고 전해진다. 紂는 ..

역사와 인문학 2024.01.01

태갑太甲과 이윤伊尹

史記 · 殷本紀에 따르면 天乙 뒤로, 아들 太丁은 일찍이 죽어 太丁의 아우 外丙과 仲壬이 차례로 즉위한 뒤 아들 太甲이 즉위했다. 殷本紀에서는 太甲이 湯法을 어기고 황음무도해, 天乙의 신하 伊尹이 그를 桐宮에 가두었는데 3년 뒤 太甲이 행실을 뉘우치자 그에게 왕위를 돌려주었다고 전해진다. 이 기록은 유가의 입김이 너무 강해 마치 한 편의 동화와도 같은데 훗날 많은 역사 속 야심가들에 의해 악용되었다 반대로 竹書紀年에서는 天乙로부터 太甲까지 왕위에 오른 순서는 같지만 太甲이 아직 어려 伊尹이 그를 별궁에 가두고 왕위에 올랐다가 7년 뒤 太甲에게 처단되었다고 전해진다. 아무래도 竹書紀年 기록이 현실에 더 들어맞는다 고고자료 갑골문에 따르면 大乙의 뒤를 이어 大丁도 즉위했고, 大甲이 바로 그 뒤를 이었으며 外..

역사와 인문학 2023.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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