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成湯은 대륙 역사상 공인된 최초의 국가 商王朝의 창업주다. 전래문헌에 湯의 시호는 天乙로 기록되었고 갑골문에는 大乙(天은 大에 머리만 덮였으므로 大가 天으로 와전되었을 것), 成과 唐(湯은 唐에서 啺을 거쳐 와전되었고 商代에는 따로 불리다가 周代부터 합쳐짐), 咸, 高祖乙로 불렸다
한때 갑골문에 商湯의 치적이 번성기 祖처럼 묘사되었다는 학설을 믿고 商王朝의 창업주를 湯의 六代祖 上甲으로 앞당기고 싶어 했던 적이 있으나 이는 무리가 매우 크며 갑골 제례상으로도 商王朝의 창업주는 成湯임에 이견이 없을 듯하다. 이 글은 위 주제를 바탕으로 써 내려간다
갑골문합집 32384에 의하면 上甲에서 祖乙, 羌甲에 이르기까지 上甲과 직계 先王에는 제수품 10점이 언급되고 上甲과 大乙 사이 5世와 방계 先王에는 3점만이 언급되었다. 上甲으로부터 六示도 商代 직계조상인데 後 5世에 제수품이 3점만 언급되었다는 것은 왕조 창업전후 先公과 先王의 차이일 것이다. 이 六示의 묘호가 甲-乙-丙-丁, 壬-癸 순차로 인위적으로 나열되었을 것도 감안해야 한다
또 卜辞에는 高祖乙과 中宗祖乙 이래 小祖乙(小乙), 武祖乙과 后祖乙(武乙) 등이 나타나는데 小祖와 武祖, 后祖(后는 後와 호환됨) 등을 존호로 이해해서는 안 되며 商代에는 祖王 이상 세대를 祖某로 자주 칭했듯 康祖丁처럼 여러 祖乙을 구분하기 위해 祖는 묘호 사이에 수식어로 쓰였다. 高祖乙은 大乙로卜辞에 최고 조상신이란 의미로 夒 또는 夔와 王亥, 河도 高祖로 불렸고 大乙은 初代 商王이기에 그에게 高祖는 존호로 쓰여 후대 왕조 창업주에게로 이어졌을 것이다
卜辞 상에 商 전기 공적이 지대한 先王 大乙(高祖), 大甲(太宗), 祖乙(中宗)을 함께 제사했는데 上甲은 함께 제사되지 않았고 高祖로도 불리지 않았다. 六示 시대까지 본거지는 고고발굴상으로도 명확치 않으며 商代 도읍은 成唐의 古都로 추정되는 허난 옌스 유적으로부터 공인된다. 따라서 商朝 창업의 主는 전래문헌에서 말하듯 大乙이다
대신 上甲을 商 왕실 開祖로는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는 商代 先公先王 첫머리로 그보다 선대 遠祖先公은 원래 商代 연맹 氏族 수호신이 商族 자연신으로 편입되어 祖甲 시대 제례 개혁으로 제사에서 삭제되어, 六示의 前 4世는 실전되었을 것이나 示壬과 示癸부터는 직계 先王의 배우자 先妣가 함께 제사된 점에서 그러할 것이다. 商 왕실의 실질 開祖인 만큼 그의 신위( + )는 後 3世가 匚에만 안치된 데 반해 □안에 고이 안치되어 그의 묘호에서 甲자가 완성되었고 후기 제례 개혁으로 商代 최고 조상신으로 변모했다
上甲의 諱는 微로 전래문헌에서 王亥의 아들로 전해지는데 王亥가 외지로 상거래를 다니다가 有易에서 재물과 사육한 소를 빼앗기고 피살되자 河伯의 도움으로 有易을 멸하고 商族을 부흥시켰다. 이 전승이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고증할 수 없으나 신석기시대에는 자연재해와 구리, 주석 발견으로 인한 지배층의 탐욕으로 부락 간 전쟁이 잦았고 가장 강성한 부락이 국가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높다. 그렇게 上甲微 시대로부터 商族은 역사시대에 들어서며 그는 왕조 창업의 기반을 마련했고 商代 왕실 법도도 六示 시대에 윤곽이 정해졌을 것이다
六世 뒤 成唐은 方族 대표 伊尹과 仲虺 등의 협력을 얻어 당대 최대 세력 얼리터우를 정복하고 마침내 商王朝를 창업했다. 商代 第一 도읍 亳은 옌스 얼리터우에서 東으로 8km 떨어진 옌스 商城(고서상 尸鄕)으로 추정되고 얼리터우 末代를 多亳 중 西亳으로 지목하기도 하나 이는 나중에 상세히 다루도록 한다. 商代 개국연도를 학계에서는 기원전 1600년으로 정했고 이 연도는 신뢰성이 높은데 16세기 얼리터우 末代 유적 전반 반세기로 보아 唐이 얼리터우를 점령한 연도는 50년 더 늦춰질 수도 있다
詩經에 湯의 시호는 武湯, 武王이라고도 했는데 갑골문 중 大乙의 시호 成과 咸은 도끼 또는 창을 상형화한 戊자에서 파생되었고 얼리터우를 정복하고 商王朝를 창업하고도 成湯之治는 군사활동의 연속으로 西로 羌과 氐, 東으로 夷를 정벌해 商代 약 5세기 기본 강역을 확보했을 것이므로 사료들이 서로 일치한다

갑골문에 商湯이 번성기 祖로 묘사되었다는 학설은 갑골문은 전대 역사 기록이 아니라 점복 기록이 지배적이고 당대에는 國이 단일 王朝로 의미되지 못해 학자들이 오인했을 것이다. 갑골문에는 邑을 새로 건설했다는 구절만이 언급된다
湯의 실제 치적도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商代 갑골문에 수없이 나타나는 인신공양은 어느 특정 시대에 갑자기가 아니라 전세기부터 오랜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왔을 것이므로 湯이라고 遠古 사회 안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것으로 史記 殷本紀에 묘사된 湯과 商代 흥성기 先王의 덕정도 권력을 가진 제후에 의해 칭송되었고 이미 기원전 30세기 후반 유적들에서부터 인신공양의 흔적이 발견된다. 書經 湯誓에 의하면 湯이 夏桀을 정벌하기 앞서 商軍이 湯에게 桀이 포악무도한 것은 그들이 개입할 바 아님을 의사로 전하자 이에 湯은 天帝의 권능을 빌미로 夏桀의 죄를 표명하고 余一人(갑골문에 商王이 스스로를 칭한 것을 그대로 가져옴)을 따라 공을 세우면 상을 내릴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처자마저 몰살하겠다고 위협했는데 이 구절로 미루어 보아서도 湯의 夏 정벌과, 桀의 죄악은 온전히 湯(지배층)의 판단이지 결코 민중의 의사는 반영되지 않았을 것이다(윤내현 商周史 인용). 얼리터우 유적 全代를 보아도 商代와는 달리 얼리터우 유형 유물들만이 발굴되어 이의 근거가 되고 따라서 書經 기록처럼 湯이 夏桀을 타도했음에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었으며 商族의 나라를 건국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얼리터우를 정복해야만 했다
고문헌에 묘사된 夏代 전 천자국과 제후국들은 비록 신화화되었을 것이나 최초의 국가가 성립되는 과정이 여실히 반영되었음으로 이해할 수 있겠고 堯의 古都로 추측되는 타오스 유적의 예만 보아도 이미 왕조의 자격이 갖추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얼리터우 시대까지는 끝내 문자를 개발하지 못한 채 선사시대에 머물렀고 시대를 같이했던 웨스 문화도 商代란 시대에 눌리다가 후대 문헌에 九夷로 나타나듯 소수민족으로 분열했다. 따라서 전근대 문명의 시초는 갑골문이란 문자 유물로 공인된 商代가 된다
고서에 의하면 이미 黄帝 시대를 전후로 대륙에 천자와 제후 간 봉건사회가 형성되었고 商代 창업의 主 成湯도 제후에 의해 천자로 추대되었다고 하나 그간 고고자료로 검증한 바 成湯이 商王朝를 창업하면서부터 비로소 異姓의 프로토 봉건제가 마련되었고 成湯은 제사에 따른 천자-제후 간 봉건 관계와 宗廟社稷, 신분제 및 노예제, 謚法(商代에도 엄연히 謚法은 있었을 법하나 가령 大, 中, 小, 祖 등으로 간략했고 창업주의 시호 成과 후기 文, 武, 康 등을 바탕으로 謚法은 周代에 완성되었고 廟号는 이미 商代부터 마련됨)을 마련해 전근대 왕조 사회의 開祖가 되었다
물론 이 또한 추측에 불과하다. 갑골문은 점복 기록이 절대적이고 절대다수도 殷墟에서 발굴되어 商史는 사실상 般庚 시대 전까지는 선사시대다. 그러나 갑골문이란 문자 유물로 동아시아 역사상 최초의 국가이자 대륙 初代 왕조 商代 창업의 主 成湯의 존재가 공인되면서 그를 문자화된 전근대 문명의 開祖로 인정할 수 있겠으며 黄帝가 夷夏를 통틀어 華夏民 시조가 된 신화도 商代에 외래 方族을 정복함과 함께 그들의 문물을 수용해 당대에 찬란한 문화를 이룩한 데서 이입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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