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갑太甲과 이윤伊尹

2023. 11. 17. 21:29역사와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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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 · 殷本紀에 따르면 天乙의 뒤로, 아들 太丁은 일찍이 죽어 太丁의 아우 外丙과 仲壬이 차례로 즉위한 뒤 아들 太甲이 즉위했다. 殷本紀에서는 太甲이 湯法을 어기고 황음무도해, 天乙의 신하 伊尹이 그를 동궁桐宮에 가두었는데 3년 뒤 太甲이 행실을 뉘우치자 그에게 왕위를 돌려주었다고 전해진다. 이 기록은 유가의 입김이 너무 강해 마치 한 편의 동화와도 같은데 훗날 많은 역사 속의 야심가들에 의해 악용되었다
반대로 竹書紀年에서는 天乙로부터 太甲까지 왕위에 오른 순서는 같지만 太甲이 아직 어려 伊尹이 그를 별궁에 가두고 왕위에 올랐다가 7년 뒤 太甲에게 처단되었다고 전해진다.
아무래도 竹書紀年의 기록이 현실에 더 들어맞는다       


고고자료 갑골문에 따르면 大乙의 뒤를 이어 大丁(太丁)도 즉위했고, 大甲이 바로 그 뒤를 이었으며 外丙은 大甲의 아우로 그의 뒤를 이었다고 기록되었다. 仲壬(南壬이라고도 한다)과, 大甲의 뒤를 이었다는 沃丁은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고고자료에 맞추어 大甲과 伊尹의 故事를 어떻게 다시 써야 할까? 竹書紀年의 기록을 따라 大甲이 아직 어려 伊尹에게 왕위를 빼앗겼다는 기록이 실제로는 아마 大甲의 아들 大庚이 그러했을 것으로, 大庚이 어려 伊尹을 견제할 만큼 지혜롭지 못하므로 먼저 아우 外丙에게 왕위를 계승시킨 뒤 아들에게 왕위가 돌아가도록 장치를 해 놓았을 것이다               
         
실제로도 갑골문을 보면 商代 왕들은 아직 절대 권력을 다지지 못했고 귀족들의 대표 및 제사장일 것이란 정황이 자주 보이는데 商 왕조는 흔히 전해지는 전근대 왕조처럼 단일 영토 국가가 아니라 기껏해야 거대한 하나의 울타리 안에 중앙의 商 왕실과 각 지역 씨족들의 연맹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商 왕실이 입지를 다지기 위해서는 지방 씨족 및 제후의 옹호를 얻기 위해 그들의 권한을 인정해야 했고, 조상 신앙도 씨족들의 신앙을 가져가 제사를 지냈다. 씨족의 대표 및 제후는 때때로 왕실의 제사를 대리하기까지 했으니 이들에 의해 商 왕실이 좌지우지되었을 터인데 갑골문에 伊尹과, 大戊 시대의 咸戊(巫咸) 그리고 祖乙 시대의 学戊(巫賢)와 같은 先臣들도 조상의 신위로 제사가 지내진 기록이 보인다. 早商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적에서 왕릉이 보이지 않고 청동 기물이 아직 왕권을 상징하지 않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商代 갑옷


商代는 中丁이 처음으로 傲(아마 허난 정저우鄭州 얼리강二里岡 유적, 정저우 商城)로 천도하면서부터 왕의 아우와 적장자가 왕위 다툼으로 도읍을 세 번이나 더 옮겨 다니며 나라가 혼란스러웠다고 역사 기록이 전하는데 이런 혼란은 아마 갑골문의 기록에 따라 大甲이 아우 外丙에게 왕위를 계승시키면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갑골문에 근거해 大甲 · 外丙 형제의 뒤로 大甲의 아들 大庚 · 小甲 형제, 그 뒤로 大庚의 아들 大戊 · 呂己 형제, 그 뒤로 大戊의 아들 中丁 · 外壬 · 戔甲 형제의 뒤로 商 왕실은 中丁의 아들 中宗 祖乙이 적장자 祖辛에게 왕위를 계승시키며 잠시 안정되었다(書經과 史記에는 大戊가 中宗이라고 기록되었으나 왕궈웨이王國維가 竹書紀年의 기록대로 祖乙이 中宗임을 밝혔다)                                      

갑골문에 근거해 商 왕실은 大乙 앞 여섯 선조(六示)의 시대부터 시작해 왕실의 법도도 六示로부터 마련된 것 같은데 上甲에서부터 大乙 · 大丁 · 大甲까지는 모두 적장자, 직계가 왕위를 이었지만 大甲의 뒤는 그 아우 外丙, 즉 방계가 왕위를 이었다. 伊尹을 견제하고 적장자에게 무사히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장치를 했겠지만 왕실의 법도가 깨졌고 그 뒤로 직계 왕의 적장자와 아우가 왕위를 다투면서 나라가 혼란스러워졌다
같은 예로 훗날 武丁의 아들 祖甲이 제례를 개혁해 형을 제치고, 그 자손들이 왕위를 잇는데 이를 역사에서는 祖甲이 황음무도했다고 전한다. 祖甲이 방계 왕의 뒤를 그 형, 직계 왕의 아들이 잇는 당시 계승법을 깬 것이 와전되었을 것이다. 祖甲은 商 왕실의 제사에서 제후의 입김을 없앴기도 했으므로, 史記는 사마천에 의해 제후의 입장이 비추어져 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大甲이 황음무도했다는 역사 기록은 그의 치세로부터 직계 왕의 아우와 적장자가 왕위를 다투기 시작해 왕실이 어지러워진 것이 와전되었을 것이다. 또한 신하 伊尹이 조상신으로 모셔진 것은, 물론 商 왕실을 도운 공적이 매우 크기도 했겠지만 딱히 왕실에 충성심 때문이 아니라 당시에는 왕권이 미약해 신하들과 지방 씨족의 대표 및 제후도 제사권을 가졌고 그들에 의해 왕실이 좌지우지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다만 竹書紀年의 기록대로 伊尹이 권력을 두고 왕과 대립만 했지 왕위를 빼앗은 뒤 처단당한 것 같진 않다. 大戊 시대에 伊尹의 아들 伊陟이 활약했다는 기록이 있듯 당시는 철저히 혈연 중심의 사회였고, 아무리 왕권이 미약해도 商王은 엄연히 제사장인데 역도들을 마녀사냥하기 위한 신탁 정도는 이용할 수 있었을 것으로 伊尹이 왕위를 찬탈해 처단되었다면 갑골문으로 섬겨지는 일 또한 없었을 것이다

 

遠古의 역사를 계몽군주주의, 전제왕권 시대에 쓰인 역사 기록에 맞춰 이해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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