帝辛, 사실 성군으로 치켜져 마땅한 마지막 商王

2024. 1. 1. 16:50역사와 인문학

728x90
300x250

帝辛은 商代 마지막 왕으로 역사에 흔히 紂라는 불명예스러운 시호로 잘 알려졌다
역사에 기록된 그의 악행은 다음과 같다. 紂는 키가 크고 완력이 세어 맹수를 맨손으로 때려눕혔고 총명하여 모든 잘못을 언변으로 가릴 수 있었는데 그는 그 재주를 과신하여 세상 모든 이들이 노예인 줄 알았고 귀신마저 깔아 내리고 제사를 게을리하였다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어 녹대鹿台에 세상의 재물을 쌓는 한편 달기妲己란 여자와 함께 주지육림酒池肉林으로 향락을 즐겼고 포락炮烙의 刑을 보여 자기에게 反하는 백성들을 괴롭혔다
그리고 비렴飛廉 - 악래悪来 父子와 같은 간악한 이들을 곁에 두고 미자계微子啓와 기자箕子 같은 현인들을 멀리하고 끝내는 현인 비간比干이 충언을 하자 그의 심장을 갈랐다. 그의 폭정으로 천하가 신음하자 周 武王이 일어나 紂를 벌하고 백성들을 구했다고 전해진다. 紂는 夏桀과 함께 동양에서 폭군의 대명사로 불린다

그런데 紂라고 불린 왕의 악행으로 전해지는 전래 문헌들의 기록은 너무나도 의심스럽다. 원래 紂의 악행은 막연하게 황음무도했다는 기록 겨우 한 구절이었다. 比干도 숙청했다는 한 구절로만 전해졌다. 그러던 것이 戦國 시대에 들어서더니 갑자기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漢代에 이르러서는 사마천이 史記에 酒池肉林과 炮烙刑 같은 문학성 짙은 문장을 덧붙이고 比干도 심장을 갈라 죽였다며 紂의 악행을 불렸다. 그로부터 후대에도 그의 악행은 계속해서 더해졌고 明代에 이르러 봉신연의란 삼류 소설에서는 아예 요마가 되었다
이렇듯 帝辛의 악행으로 전해지는 고문헌들의 기록은 시대에 따라 창작력만이 더해져 설득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래서 孔子의 제자 子貢도 紂의 악행은 의심스럽다고 한 바 있고, 한 사람이 그렇게까지 악할 수는 없으며 여러 사람의 죄가 한 사람에게만 덮어씌워졌다고 반문했다
더욱이 오늘날 고고자료에 맞추면 子貢의 언급에 신빙성이 더해진다


고고자료 갑골문으로 보건대, 帝辛의 치적은 전래 문헌들의 정반대에 가까웠다. 子貢의 언급처럼 겨우 帝辛 한 사람이 그렇게까지 잔인할 수는 없었으며 발굴된 갑골문과 은허 유적에 의하면 商代 풍습이 잔혹했던 것이 와전되었음으로 밝혀졌다. 당시 商 왕실의 일상은 제사와 전쟁이었는데 商王은 제사에 전쟁 포로들을 제물로 바쳤고 포로들을 다스리기 위한 수단 역시 가혹했다. 그것을 기록한 商代 문자들이 漢字가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가령 갑골문에서, 民자는 포로가 시력을 못 이용하도록 한쪽 눈을 칼로 찌른 모습으로 그려졌고 赤자는 人牲을 불에 태우는 모습으로 그려졌으며 棄자는 아기를 항아리에 담아 버리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갑골문에는 人牲을 물에 빠뜨리거나 목을 베거나 산 채로 묻는 등의 방식으로 제례에 바치는 기록도 적나라하다
포로가 도망을 하면 다리를 잘랐으며 후대의 五刑도 이미 商代부터 행해졌다. 이밖에도 노예와 하층민에 잔혹했던 商代 풍습은 갑골문에 수없이 묘사되었다
또 기록의 鹿台는 오늘날 63 빌딩의 높이가 되는데 商代 건축기술의 발전은 더디어 내구력은 물론 기와도 제대로 굽지 못해 지푸라기로 지붕을 만들었는데 鹿台와 같은 거대 건물이 당대에 세워졌을 리는 만무할 것이다

武丁 시대 59년 동안만 해도 人牲은 5418명에 달하는데 帝辛은 진보파로 오히려 악습을 타파하여 帝乙과 帝辛 父子 시대에는 다 합쳐 겨우 몇십만 보일 뿐이다. 아마 帝辛 시대의 人牲은 군사 활동에서 사로잡은 方族의 대표와 간부들만으로 商 왕실의 위엄을 다지는 데 바쳐졌을 것이다
帝辛은 28대 商王 帝乙의 적통으로 태어나 막내임에도, 생모의 신분이 천한 이복형 微子啓를 제치고 왕위에 올랐다. 그만큼 商 왕실은 祖甲 시대부터 제례를 개혁하면서 嫡子의 왕위 계승이 보장되고 지방 제후와 연맹 方族들의 지배력에도 세력을 뻗쳐 帝乙 - 帝辛 父子 시대에는 최초로 대륙에서 중앙집권이 갖춰져 단일 영토 국가가 나타나려고 했다. 때문에 원래 商代에 帝는 만물의 절대신을 뜻했지만 그 칭호가 왕에게 바쳐졌다
앞서 언급했듯 帝辛은 노예를 학대하는 관습을 타파하고, 그들을 생산 활동에 풀어 귀족들의 富를 꺾고 국고를 충당했다. 帝辛이 鹿台에 재물을 저장했다는 기록은 실제로는 이를 뜻한다. 또한 그는 왕권을 뒷받침하기 위해 출신, 성분에 얽매이지 않고 노예에게도 출세의 길을 틔워주었는데 전래 기록에 보이는 飛廉 - 悪来 父子와 같은 이들이 그렇다. 갑골문에 妲己와 같은 여자는 전혀 보이지 않지만 같은 맥락에서 왕권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기득권을 쥔 귀족들과 제후는 견제하고, 그녀와 같은 출신과 성분이 불분명한 여자를 맞이해야 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역사 기록과는 달리 帝辛은 제사도 존중했고, 다만 帝乙 - 帝辛 父子 시대에는 祖甲 시대의 유신을 받아들여 실용적인 제례만을 남겼던 것 같다. 또한 牛耕을 도입하고 水利 사업을 일으켜 농업을 개혁하고 수공업을 장려함으로써 경제력을 쌓아 군사력에 투자했다. 따라서 그의 시대에 나라가 쇠미해졌다는 역사 기록과는 달리 왕조가 개국된 이래로 유례없이 강대해졌다
帝辛은 그 국력을 바탕으로 국경 동남쪽의 東夷를 누르고 창강 하류까지 진출했다. 덕분에 처음으로 중원의 문명이 남방에 전해지고 최초로 거대한 단일 영토 국가가 이룩되려고 했다
따라서 紂로 폄하된 帝辛이야말로 기득권에 맞서 민초들을 대변하고 부국강병을 이루었으니 그를 역사 속 성군으로 치켜세워야 마땅하겠다


그러나 帝辛이 민초들의 편에 서고 절대왕정을 완성할수록 기득권층에 자리한 귀족들과 제후로부터는 반발을 샀으니 바로 微子啓와 比干과 같은 귀족들이 그러했다. 比干과 箕子는 帝辛의 숙부로, 보수파로써 武丁 시대를 받들었다. 그러니 商末 3대 현인으로 불렸던 이들은 帝乙 - 帝辛 父子의 정적이 되어 숙청당할 수밖에 없었다
商代의 서방에서는 周族이 세력을 키워나갔고 상나라를 뒤엎기 위해 왕위 계승에서 밀려난 微子啓로 하여금 여론을 이용해 商 朝廷에 親周派를 심었다. 微子啓는 周代 개국 공신으로서 周 왕실로부터 분봉을 받아 宋國을 열었는데 微子啓는 聖人이 아니라 배신자로 불려야 마땅하다

그리고 帝辛 시대의 국력은 마냥 강성하지만 않았고 수십 차례의 정벌 전쟁으로 국력이 피로해지기도 했고 특히 서방에서 영향력을 상실했는데 商 정규군이 東夷 정벌을 나갔을 때 周族은 연합 세력과 함께 商을 쳤다. 그 시점에 商 王都는 체계가 흐트러진 노예 용병들에게 수비되었는데 그들은 周 연합군과 마주하자 지휘에 따르지 않고 자기 왕에게 거꾸로 창을 겨눴다. 帝辛은 국력을 믿고 자만했는지 당시 도읍 朝歌에 성곽조차 두르지 않아 허무하게 무너졌다
商 왕조는 600년 가까이 중원의 覇者로 군림했다가 이렇게 하루아침에 허망하게 멸망했다(기원전 1046년). 商 王都는 周 武王에 의해 불태워져 폐허가 되었고 불모지가 되었다. 그러나 商 왕실이 사라졌음에도 그 유민들은 帝辛의 아들 武庚을 내세워 각지에서 周 왕실에 맞섰는데 당시 민초들이 그들의 왕과 유대감이 깊었음을 알 수 있다. 武王은 그를 감당 못하고 왕위에 오른 지 4년 만에 죽었다


후대 유가는 周代를 지상낙원으로 믿으며 周 왕실의 입맛에 맞게 帝辛의 업적을 가리고 폭정으로부터 인민을 구한다는 프로파간다를 내세워 정권을 정당화했다. 역사에서는 천하가 帝辛을 紂라는 마귀의 이름으로 불렀다고 했지만 천하가 아니라 유가만이 그리 불렀을 뿐이다. 따라서 유학자들이 줄기차게 강조했던 紂의 악행은 절대적으로 설득력이 낮다
周 왕조가 들어서자 왕실은 협력했던 연합 세력을 붙잡아야 했기에 봉건제란 당근을 채택해야만 했다. 덕분에 문명은 전대보다 퇴보했고 훗날 제후들의 세력이 周 왕실을 뛰어넘을 만큼 커져 춘추전국시대란 난세를 겪기도 했다
만약 帝辛의 치세가 완성되었다면 아마 동양이 서양보다 수세기 먼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이룰 수도 있었을 것이다

728x90
반응형

'역사와 인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탕成湯, 전근대 왕조 문명의 開祖  (2) 2024.02.07
도철饕餮과 치우蚩尤  (0) 2024.01.03
제곡帝喾은 여신인가  (2) 2023.12.10
갑골문의 제곡帝喾과 설契  (4) 2023.11.25
태갑太甲과 이윤伊尹  (0) 2023.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