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탕成湯, 전근대 왕조 문명의 開祖

2024. 2. 7. 15:21역사와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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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湯은 대륙 역사상 공인된 최초의 국가 商朝의 창업주다. 전래 문헌에서 湯의 시호는 天乙로 불리는데 商代 갑골문에서는 大乙(大에서 天으로 와전되었을 것이다), 成과 唐(商代에는 따로 불렸다가 周代부터 합쳐져 불렸고 唐은 湯으로 와전됨), 咸, 高祖乙로 불린다. 한때 湯이란 왕의 치적이 갑골문에서는 번성기의 祖로 기록되었다는 학계의 견해를 믿고 商 왕조의 시조를 大乙의 6대조 上甲으로 앞당기고 싶어 했던 적이 있으나 이는 무리가 매우 크며 전래 문헌에서 전해지듯이 갑골문의 제례와 맞춰도 成湯이 商 왕조의 시조가 맞는 것 같다
이번 글은 먼저 이에 대해 전제를 두면서 시작한다


갑골 卜辞에는 을미일에 上甲에서부터 祖乙과 羌甲에 이르기까지 제사를 올린 기록이 있는데 제수품이 上甲에게는 10개가 바쳐졌지만 報乙부터 示癸까지는 3개만이 바쳐졌고 大乙부터 祖乙까지 직계 先王에게는 10개, 방계에는 3개만이 바쳐졌다. 비록 제례 갑골은 이것이 다가 아니지만 大乙 앞 六示도 商 왕실의 직계 조상인데 上甲을 제외한 나머지에게는 제수품이 3개만 바쳐졌다는 데서, 묘호의 십간이 너무 순차대로 정해져 인위로 나열되었을 것이란 데서 이 六示까지는 왕조 전 先公에 속한다
또한 大乙은 갑골문에서 高祖라고 불렸는데 商代 제례에 따르면 父王과 그 형제는 모두 父, 할아비 이상의 先王부터는 모두 祖라고도 했다. 갑골문에는 帝乙을 제외하고 高祖乙과 中宗 祖乙(下乙로도 불린다) 아래로 小祖乙(小乙), 武祖乙과 后祖乙(武乙, 갑골문의 后는 後로도 쓰임)이 보이는데 小祖, 武祖 등을 존호로 이해해서는 아니 되며 여러 祖乙을 구분 짓기 위해, 康丁을 康祖丁으로도 부르듯 祖는 묘호 사이에 수식어로 쓰였다
다만 高祖乙의 高祖는 존호로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은데 高祖乙은 高乙이 아니라 大乙로 불리기 때문이다. 물론 갑골문의 高祖가 조상신 夒(또는 夔), 王亥에게도 바쳐졌고 이들은 말 그대로 조상 신앙으로 초월의 존재를 왕실과 잇기 위해 조상이란 뜻으로 高祖라고 불렀지만 大乙은 初代 商王이란 데서, 高祖가 후대에 왕조 시조의 묘호로도 바쳐졌다는 데서 미루어보건대 高祖乙의 高祖는 존호로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卜辞에는 고문헌에도 기록된 공적이 큰, 왕조 중반기까지 先王 大乙(高祖)-大甲(太宗)-祖乙(中宗)을 함께 제사한 기록도 있는데 上甲이 왕조의 시조 및 先王이었다면 大乙 앞에 上甲도 제사가 지내져야지 그러지 못했고 高祖로도 불리지 않았다
따라서 商朝 창업의 主는 전래 문헌에서 전해지듯 大乙이 맞다

다만 上甲을 商 왕실의 시조로는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商代 先公先王의 첫머리로 그 전의 先公들은 商 왕실의 직계 조상이 아니라 연맹 씨족들의 신앙에서 가져와 나중에 제례 대상에서 없어졌다는 데서, 上甲에서부터 商代 왕의 시호 십간이 들어간다는 데서, 示壬과 示癸에서부터는 先王의 배우자 先妣에게도 제사가 지내졌다는 데서 上甲을 商 왕실의 開祖라고 할 수 있다
전래 문헌에는 商族이 무역을 하다가 有易과 마찰을 빚고 소와 재물을 빼앗기자 上甲이 有易을 멸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가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인류는 이미 先史 시대부터 부족을 이루어 흔히 전쟁을 했고 가장 강한 부족이 국가를 이루었다는 데서 신빙성은 높다. 그는 그렇게 왕조의 건국으로 이어질 기반을 마련했고 商代 왕실의 법도도 이미 大乙 앞 六示로부터 마련되었을 것이고 七廟도 이 六示가 기원일 것이다
왕실의 시조인 만큼, 그의 뒤 세 선조의 신위는 匚에 안치되었지만 上甲의 신위( + )는 □ 안에 고이 안치되어 그의 묘호로부터 甲자가 완성되었고 祖甲 시대에 제례가 개혁되면서 商 왕실의 최고 조상신이 되었다


그 뒤 成湯은 亳(오늘날 허난 옌스)에 商 왕실의 첫 도읍을 정하고 그곳에서 伊尹을 얻고 右尹으로 삼아 그의 도움으로 왕궁과 도시를 세우고 나라의 법과 관직을 마련했고 仲虺를 左尹으로 삼고 그를 비롯해 주변 方族들을 商 왕실의 우방으로 끌어들이며 마침내 왕조를 완성, 즉 건국하였다. 商代 개국 연도를 학계에서는 기원전 1600년으로 정했지만 商湯이 夏朝와 桀을 멸하고 새 왕조를 세운 공적은 갑골문 어디에도 없을뿐더러 商族은 과거 어느 누구도 섬긴 적이 없어 夏 왕조의 존재는 오늘날 부정되므로 商代 개국 연도를 20여 년 앞당겨 기원전 16세기 末로 다시 정할 수 있겠다
史記 殷本紀에는 伊尹이 노예 출신으로 전해지지만, 당시는 철저히 혈연이 강조되었듯 그도 원래는 黄帝의 신하 力牧의 후예로 전해지고 商朝는 商 왕실의 우방 方族들과 여러 邑(당시는 도시국가 및 제후)의 연맹으로 이루어져서 그들의 영향력이 강해 先臣들이 제후를 역임하며 중앙 왕실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었다는 데서 伊尹 또한 주변 부락의 대표 출신일 가능성이 더 크다
仲虺의 虺자는 살모사를 뜻하므로 仲虺가 뱀 토템 부락의 대표 출신일 것을 암시하며 갑골문에도 뱀 모양에 제사한 것을 학자들은 그로 본다. 成湯은 仲虺의 협력을 받아 이웃한 方族들을 우방으로 끌어들였을 것이다

갑골문에서 商湯이 번성기의 祖로 기록되었다는 학설은 商代에는 후대처럼 王朝, 建國과 같은 말을 몰랐고 갑골문에 그 같은 언어를 남기지 않아 아마 학자들이 오인을 한 것 같다. 즉 이런 언어는 오늘날의 관점이지 당대의 관점은 아니다. 갑골문에는 그저 邑을 새로 세웠다는 구절만이 보인다
전래 문헌에서 湯이 덕망 높았다는 기록도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遠古의 역사를 무턱대고 계몽군주주의 시대에 쓰인 문헌에 맞춰 이해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商代와 같은 遠古 시대에 百姓은 평민이 아니라 姓과 氏를 가질 수 있었던 귀족들을 뜻했고 그 시대에 하층민은 귀족들의 재산 및 생산 수단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湯이 대륙 역사상 최초 왕조의 개국 시조로, 명군이었을 것은 믿어 의심치 않지만 商代의 풍습은 어느 세월에 갑자기 한 번에가 아니라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전통이 되어 이어져 내려왔을 것이므로 湯이라고 遠古 시대 정치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唐이 스스로 제물이 되어 오랜 가뭄 끝에 비를 구했다는 전래 문헌의 기록이 있는데 이는 신빙성이 비교적 높을 것 같다. 당대에는 가뭄이 심하면 끝끝내는 귀족들의 대표 왕까지 제물로 바쳐졌기 때문이다
成湯이 군사력으로 공적을 세운 행적은 고문헌과 갑골문의 기록에 모두 맞춰도 실제로 있었던 것 같다. 詩經 商頌에서 그는 武湯과 武王으로도 불리는데, 갑골문에서 그를 가리킨 成과 咸도 戊 또는 戌에서 파생되었고 이 字는 창 또는 도끼의 모습에서 나왔으므로 成湯이 군사활동으로 공적을 이루었음을 나타낸다. 夏代를 뒤엎은 적은 없지만 갑골문의 증언에 따라 成湯은 내치를 다지며 기른 군사력으로 동으로는 夷, 서로는 羌과 氐를 누르고 600년 가까이 商代 기본 강역을 확보했을 것이다



고문헌에는 대륙의 역사 기록이 이미 창세 신화 속 三皇과 五帝 시대에서 시작하고 黄帝가 중화 문명의 開祖로 전해지는데 이를 절대 역사로는 인정할 수 없고 고대인들의 환상에 그친다. 물론 그 신화가 발굴된 고고자료 덕분에 아무런 근거 없이 허무맹랑하기만 하진 않음으로 밝혀졌다. 연구 결과 고대인의 환상은 그 과거의 고고자료들로부터 기억되어 대대로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며 신격화에 이르렀음으로 증명되었으니 그 신화도 역사의 일부로는 받아들여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니 어디까지나 신화는 신화로 이해해야 한다
고문헌에 기록된 上古 적 왕조 문명도 원시사회에서 역사 시대 세습 왕조 및 국가가 이루어지는 과정이 잘 비유되었는데 山西 타오스와 허난 왕청강, 얼리터우 둥샤펑 유적 등은 아직 신석기시대임에도 문명의 수준이 높아 초기 도시 국가의 꼴이 갖춰졌으므로 문헌의 전승이 뒷받침되긴 한다. 그러나 이들 유적은 문자를 개발 못한 채 어느 세월에 갑자기 사라져 끝내 세습 왕조를 못 이루었고 대륙 동해안 산둥 방면의, 다원커우와 룽산 문명의 후신 청동기 웨스 문명도 商 왕조에 눌려 후대에 九夷란 기록으로 나타나듯 여러 작은 세력으로 분열되었다가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따라서 대륙 역사 문명의 시초는 갑골문이란 문자 유물로 공인된 商代가 된다

전통 문헌에는 黄帝 시대의 전후를 기준으로 이미 천자와 제후가 공존했고, 商代 창업의 主 成湯도 제후의 추대를 받아 천자가 되었다고 전해지지만 지금까지 정황으로 미루어보건대 成湯이 商 왕조를 창업하면서부터 역사 시대에 처음으로 제후니 분봉이니 하는 문물이 나타나 周代에 봉건제로 완성되었고 종묘 제도부터 전근대 관직과 신분제 및 노예제, 후대 왕조에서 제례에 따른 천자와 제후의 계급 그리고 왕의 謚法도 成湯 시대에 이미 틀이 마련되었다(謚法은 商代에도 엄연히 있었을 법하지만 아직 형식은 완성되지 않았고 周代부터 완성되었다. 다만 몇몇 商王의 존호, 즉 후대 왕조의 묘호는 이미 商代부터 형식이 완성되었다)
물론 이도 추측에 불과하다. 갑골문은 商代 왕실의 점복 기록이자 재위한 왕의 일상 기록이지 과거의 역사 기록은 아니라는 데서 한계가 있고 절대다수도 은허에서 발견되었다. 따라서 商史는 적어도 般庚 시대 전까지는 아직도 베일에 싸였다. 그러나 그 갑골문이란 문자 유물 덕분에 동북아 최초의 국가 商朝의 창업주 成湯의 존재가 증명되면서 그를 실존했던 전근대 왕조 문명의 開祖로 공인할 수 있겠으며 商代에 商 왕실이 주변 민족을 정복하는 한편 포용하여 그들의 문물을 수입해 당대에 찬란한 문명을 이루었다는 데서 중화 문명의 開祖 黄帝 신화와, 그가 고대 부락 연맹을 이룬 전승이 완성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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