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인문학

武丁의 중흥

다음족 2024. 6. 1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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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丁은 商 후기(殷商 시대) 중흥의 祖로 商代가 당시 기울어진 것을 크게 바로잡고 전성기를 이루어내어 高宗이란 존호로 유명하다. 전래 문헌에도 그의 시대에 천하가 기뻐했다고 기록되었고 은허 갑골문 절대다수도 그의 시대 것이며 갑골문에도 武丁 시대에 활발했던 군사 활동이 자주 기록되었다. 41세에 즉위해 59년 동안 재위했고 사방으로 商 왕조의 영토를 확장하고 나라 안에서는 사회를 개혁해 後王들의 혁명에 영감이 되었다


商代는 초기 大甲 시대부터 王弟와 王子가 번갈아가며 즉위해 왕위 다툼으로 5번이나 천도를 할 만큼 왕실 정국이 어지러웠다. 9대 中丁이 오늘날 정저우 商城에 도읍을 정하면서 그 첫 단추가 끼워졌고 그로 인해 東夷의 위협이 계속되고 우방 方族들마저 商 왕실 질서에서 이탈했다. 그러던 것이 18대 般庚이 北蒙(오늘날 허난 安陽 은허, 고서에서는 北亳이라고 했다)으로 천도해 그곳을 둘러싼 洹水에 기대어 외적의 위협을 꺾기 용이해져 그 뒤로는 도읍을 바꾸지 않았다. 그러나 般庚의 아우 小辛과 小乙 시대까지는 殷商 시대 전 혼란이 끊이지 않았는데 王弟들의 계승권으로 왕실 혼란이 아직 계속되었다
그런데 小乙-武丁 父子 시대에 이르러 왕위 계승권에 혁명이 일어났다. 小乙은 15대 商王 小丁(祖丁, 갑골문에서 四祖丁이라고도 함)의 季子로 왕위는 응당 형들 적장자에게 이어져야 했다. 그러나 小乙의 아들 昭(武丁의 諱)는 王者의 재능을 갖추었으므로 난국을 헤쳐나가기 위해 昭를 자기 다음에 즉위시키고자 했다

이때부터 전래 문헌에 小人(아마 평민 및 하층민)이 보이기 시작한다
史記 殷本紀에는 누락되었으나 書經에는 小乙이 昭를 민간으로 보내 왕좌를 위한 학습을 시켰다고 하는데 그렇게 武丁은 태자 시절에 농민들은 물론 천민, 노예들과도 같이 일하며 민생의 고충을 몸소 체험했다고 쓰였다. 그러면서 평민 학자 甘盤과, 傅険에서 일하던 노예 說을 만났다. 小乙은 즉위한 지 10년 만에 붕어하고 武丁이 즉위하자 甘盤과 說을 朝廷으로 불렀다. 甘盤은 갑골문에서 師般으로 불리고, 說이 傅說이다
武丁의 즉위로 약 300년 동안 왕실 법도가 깨져 당연히 귀족들의 반발을 샀을 것이다. 이에 武丁은 그 유명한 삼년상으로 귀족층의 반발을 잠재웠다. 3년 동안 父王의 제사를 지키며 묵언으로 귀족들의 경외감을 샀다. 귀족들이 아무리 武丁에게 말을 걸어도 3년 동안 고개로만 그들에게 대꾸했고 점차 武丁에게 신기를 느꼈다. 삼년상이 끝나자 마침내 그의 왕권은 정당화되었다. 태자 시절 민간에서 학습한 경험으로 고진감래를 도출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꿈에서 왕조 창업주 成湯의 계시를 이유로 傅說을 聖人으로 둔갑시켜 朝廷 대표로 불렀고 그로부터 武丁 59년 전성기가 열렸다
商代에는 귀신을 섬겼고 미신에도 민감했을 테니 삼년상을 통한 武丁의 왕위 계승 기록은 신빙성이 매우 높다

武丁 시대 전 흥성기 先王 덕정은 고서에도 제후가 칭송했다고 쓰였다
殷本紀에서 商 왕조 창업주 湯의 聖徳은 다음과 같다. 하루는 湯이 교외에 나서 어느 나그네를 보았는데 그가 사방 모든 참새를 그물에 낚으려고 하자 그에게 참새씨가 마를 것 같다고 다그치고 참새들에게 좌우로 날아가려면 날아가고 나머지만 그물에 걸려들라고 했다. 이에 제후들이 湯의 덕을 칭송하고 그에게 의지했다. 고서에 의하면 당시는 夏桀이 걸핏하면 군사력으로 제후를 핍박했다. 殷本紀에 의하면 大甲은 황음무도해 伊尹에 의해 桐宮에 감금되었다가 3년 동안 행실을 뉘우치고 덕을 쌓자 伊尹이 그에게 왕위를 돌려주고 제후와 인민이 大甲을 칭송했고 太宗이란 존호가 바쳐졌다. 中宗 大戊와 般庚도 제후가 그들의 덕을 칭송했다. 大甲의 경우는 개국 初에 왕조 기틀을 세우기 위해 왕에게 인민이 연결되었겠으나 나머지 흥성기 왕들에게는 제후만이 연결되었는데 이는 사마천이 漢 武帝에 의해 억울하게 궁형을 당하면서 史記가 제후와 臣権 입장에서 쓰였기 때문이고, 아무리 사마천도 사람은 완벽할 수 없어서 어쩌다 보니 군주에게 인민까지 연결 못 했다
반대로 竹書紀年은 사관에 의해 왕권 입장에서 쓰여 기록이 다르다. 天乙부터 大甲까지 즉위한 순서는 史記 殷本記와 같지만 大甲이 아직 어려 伊尹이 그를 별궁에 감금하고 왕좌를 차지했다가 7년 뒤 大甲이 각성하고 탈출해 伊尹을 처단하고 왕좌를 되찾았다고 쓰였고 中宗이란 존호도 下乙(祖乙)에게 바쳐졌고 大戊는 누락된 것 같다. 왕궈웨이도 갑골문을 통해, 竹書紀年에 의거해 商 中宗을 祖乙로 증명했는데 이는 殷商 전대 역사 때문이었을 터이다. 大甲-外丙 형제 뒤로부터 王弟와 王子가 번갈아 즉위하다가 中丁 삼 형제 뒤로 中丁의 아들 祖乙이 적장자 祖辛을 바로 즉위시켜 왕실을 잠시 안정시켰기 때문이다. 그 뒤로는 祖辛의 아우 羌甲이, 그 뒤로 祖辛의 아들 祖丁과 그 종형제 南庚(羌甲의 아들)이, 그 뒤로 祖丁의 四男들이 번갈아 즉위하면서 다시금 王弟와 王子 사이 왕위 계승 알력으로 왕실이 어지러워졌다
갑골문과 고고자료를 비추면 史記 기록은 너무 동화와도 같고(사마천은 명분이 아닌 실리를 좇아 궁형의 치욕을 견디면서까지 살아남아 史記를 썼으나 명분을 아니 좇았다 할 수 없고 실제로 그는 周代 유가를 받들었다) 竹書紀年 기록이 현실에 더 들어맞는다. 商 왕조는 거대한 하나의 울타리 안에 주체 商 왕실과, 자치권을 가진 지방 씨족들 및 제후와 다민족 연맹으로 이루어졌고 얼리강 시대에 여러 문화권 토기가 뒤섞인 것과(신석기시대 일부 토기는 이미 제례와 사치품으로 쓰이면서 청동기로 이어졌다) 全代에 걸친 복합된 문화가 이를 반영한다. 書經 君奭 편에도 나오는 商代 현신들 伊尹, 仲虺, 巫咸(갑골문 咸戊), 巫賢(갑골문 学戊) 등은 갑골문에서 조상 신위로 제사되었는데 商 왕조가 창업된 배경으로도 보아 이들은 지방 제후 및 소수 민족 대표를 역임하며 왕실에도 개입할 만큼 세력이 강했다. 고서에 巫咸과 巫賢이 왕실을 다스렸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들 先臣은 때때로 왕실 제사를 대리하기까지 했고 초기 商 왕실은 그들의 협력을 받아 왕조를 창업한 배경으로 인해 族邑들을 압도할 만한 절대왕권을 못 다졌다. 따라서 이 시대에는 아직 청동기가 왕권의 상징이 될 수 없었다
비록 전설에 의하면 伊尹은 고아로 뽕나무 아래에서 거두어져 大乙의 외가 잉신, 노예 출신이라고 하나 그도 원래는 黄帝의 간부로 전해지는 力牧 집안 후손으로 전해지듯 당시는 철저히 혈통에 의해 사회가 유지되었으니 伊尹 또한 실제로는 어느 씨족 대표 출신일 것이다. 舜과 伊尹이 명문가 출신이면서 평민, 노예 출신으로 전해지는 이유는 사대부가 언제나 벡성을 위하고 그들과 가깝다는 프로파간다를 위해서일 것이다. 참고로 遠古 시대 百姓은 평민 및 하층민이 아니라 姓을 가질 수 있는 귀족들을 가리켰다. 이는 춘추시대까지 이어지다가 전국시대부터 혈연 사회가 깨지면서 만인에게 출세길이 열리고 秦漢 시대부터 양민들도 姓을 얻으면서 평민 및 하층민을 百姓으로 통칭하게 되었다

유튜브 채널 고경에서


그러던 것이 小乙-武丁 父子 시대부터 변혁이 일어났다. 전술했듯 武丁의 아비 小乙은 祖丁의 季子므로 당대 왕실 법도에 의하면 小乙은 武丁에게 왕위를 넘길 수 없었다. 그러나 小乙은 과감히 왕실 법도를 뒤엎고 武丁에게 왕위를 계승시키기 위해 태자 시절 그를 민간으로 보내 왕도를 위한 일련의 학습을 시켰다. 태자 시절 武丁은 농민들, 노예들과도 같이 일하며 몸소 민생의 고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실제로 商代와 같은 遠古 시대 평민 및 농민은 최하층 노예들처럼 학대만 안 받았지 항시 왕실과 귀족들의 관리를 받다가 그들의 눈 밖에 나거든 노예로 전락할 운명에 놓였다
그러면서 평민 학자 般과 노예 說을 만나 인연을 맺었다. 父王이 붕어하자 武丁이 즉위했고 삼년상을 거치고 般과 說을 朝廷으로 불렀다. 갑골문에 武丁이 점복을 통해 師般에게 명을 내린 기록으로 인해 그의 실존이 증명되었고 師는 그의 관직, 甘은 姓, 般은 이름일 것이므로 왕으로부터 甘姓을 하사 받았을 것이다. 傅說은 갑골문에서는 보이지 않고 전설로만 전해지나 당대 사회에 의해 그의 전설이 창작되었을 것이다. 說은 師般처럼 武丁으로부터, 왕과 만난 곳을 따 傅姓을 하사 받았다
혈통에 의해서도 武丁은 기득권층 귀족들이 아니라 小人 출신 신진사대부의 협력을 받아야만 했다. 商王 武丁은 삼년상을 마쳤듯 기존 신권을 빌려 평민은 물론 천민에 이르기까지 출신과 성분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고용했고 이들의 도움을 받는 한편 기득권층과 타협시켜 새 시대를 안정시키면서 재위 59년 동안 商 왕조를 전성기로 이끌 수 있었다. 실제로 고서에 師般과 傅說은 각각 평민과 노예 출신으로만 전해지지 伊尹과 같은 탄생 신화는 전해지지 않는다. 비록 전설로만 전해지나 傅說은 武丁 시대 일등 공신으로 후기 청동기 司母戊方鼎도 그의 지휘 아래 제조되었다고 하며 나라 안 사회와 경제를 개혁하는데도 그의 공이 가장 컸다. 갑골문에 武丁 시대 변혁은 끊임없이 보이며 그의 시대부터 청동기는 왕권의 상징으로 자리 잡아 절대왕권이 다져지기 시작했고 내치를 바탕으로 주변 수십 方族들에 군사력을 행사하며 사방으로 영토를 확장했는데 갑골문에 이 시대 전쟁 기록은 물론 詩經 商頌 殷武 편에도 노래되었다. 영토 확장 전쟁에는 갑골문으로도 실존이 증명된 동아시아사 최초 여장부이자 武丁이 가장 사랑했던 배우자 婦好가 일등 공신이었다

전래 문헌에는 武丁 시대에 만인이 기뻐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때부터 역사에서 군왕에게 小人이 연결되기 시작하며 이는 商 高宗 武丁이 그들의 고충에 공감하고 그 계층에서 신진사대부를 발탁해 旧派와 화합시킨 역사에서 쓰였을 것이다. 그의 시대부터 대륙 역사에 처음으로 계몽군주주의가 대두되었으며 비록 派는 다르지만 祖甲 시대 제례 개혁과 帝乙-帝辛 父子 시대 정치의 세속화와 절대왕정도 武丁의 개혁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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