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인문학

商族의 族原

다음족 2024. 6. 14. 23:27
728x90
300x250

 

상나라 정벌에서

商代 약 6세기를 영위한 주체 商族의 族原에 대해서 아직까지 학계는 공통된 학설을 내놓지 못한다. 商初에서 중기까지 얼리강 문화 토기는 여러 문화권 요소가 뒤섞였다. 다만 허난성을 중심으로 다소 동방에 치우쳤을 것임에만은 동의가 된 것 같다. 특히 허난성 商丘에서 商族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고문헌에서 契이 商族 시조로 알려졌는데 그는 虞舜 시대에 司徒를 맡았고 禹의 치수를 도와 商에 봉해져 商族 初代 대표가 되었다. 契의 封地 商에는 商族 전설이 간직되어 오늘날 商丘란 지명으로 이어졌다. 산둥 曹県에서 일어났다고도 하는데 이 학설을 따르면 商族은 룽산 문화를 기반으로 일어났을 것이다. 푸쓰녠의 夷夏東西說에 의하면 원래 彩陶는 서방 華夏 계통 문화고 黑陶는 東夷 계통 문화였으나 黑陶도 彩陶에서 파생되었고 도기는 지역 차이가 아니라 시대 차이임이 고고자료에 의해 밝혀졌고 이에 국내 商史 분야 최고 권위자 윤내현 교수는 商族도 東夷 또는 上古 시대 낯선 중원 밖 종족이 아니라 華夏民 일족이고 허난성 안에서 일어났으나 다소 동방에 치우쳤을 것임을 역설했다. 아마 윤 교수도 商丘를 지목한 것 같은데 요즘 학계에서 유행하는 상나라 정벌에서도 그곳을 지목했다
윤내현은 토기가 시대 차이임과 함께 三代 왕실 開祖가 모두 華夏 공통 조상 黄帝로 연결된 것, 商 왕조 안에는 자치권을 가진 씨족들 및 다민족이 주체 商 왕실과 공존해 왕실이 그들 문화와 신앙을 수입했으니 새와 연결되는 시조 신화 또한 문물을 교류하는 과정에서 완성되었을 것이며(대륙 안에서 새 토테미즘은 의외로 창강 이남 그리고 동해안이 원조고 上古 東夷 전문가 김인희도 商族과 周族 시조 탄생 신화도 다원커우의 신앙에서 가져왔다고 했다) 商族 시조 신화는 어미가 새 알을 삼키고 잉태해 그를 낳았지만 동북방 신앙은 어미가 알을 낳아 알에서 직접 태어나는 것, 무엇보다 갑골문 어순이 현대 중국어와 같다는 등에서 본인의 견해를 역설했다

先商 문화를 허베이 남부 샤치유안下七垣 문화로 지목하기도 한다. 얼리터우가 구리를 확보하기 시작하면서 샤치유안, 허난 북부 후이웨이輝韋와 충돌한 흔적이 보인다. 그러나 商丘에서도, 샤치유안 유적에서도 얼리터우(夏 왕조로 가정되는)를 정복했을 법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샤치유안 유적도 발굴 결과 농촌이었지 도시가 이루어지진 않았다. 청동기시대 선구자 얼리터우를 멸하기 위해서는 얼리터우와 세력이 맞먹거나 더 커야 했다


商族을 東夷로 이해하는 학설도 지배적이다. 비록 룽산 문화의 黑陶는 양사오 문화 彩陶에서 파생되었지만 기원전 26세기에 들어 산둥 다원커우가 멸망하고 그 선주민들은 룽산 문화권으로 이주해 東夷 문화를 이룩했는데 산둥 룽산 문화는 얼리터우와 때를 함께해 청동기 웨스岳石 문화로까지 이어졌다

웨스 문화는 샤치유안과 후이웨이를 합친 것보다 컸고 고서에 夏 왕실이 有窮 대표 后羿에게 나라를 빼앗긴 적 있다고 기록된 만큼 세력이 강했다. 다원커우인들은 유목민 기질을 갖추어 정보력으로 주변 문화권 문물을 수입해 1400년 동안 東夷 문화를 개척했고 다원커우가 멸망하고도 룽산 문화권으로 옮겨가 웨스 시대까지 수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商族은 族名도 그렇고, 왕조를 창업하기 전 선조들이 8번이나 거주지를 바꿔 다녔고 王亥가 상업을 일으켰다는 전래 문헌의 기록이 보이듯 장사를 위해 먼 곳으로 모험을 다녔다. 인류 역사에서 외래문화에 개방되고 적극 개척에 나서야 부국강병을 이룬 예들이 증명하듯이 商族이 東夷였든, 華夏民이었지만 東夷 요소를 적극 흡수했든 왕조 전 역사를 학습한 덕분에 商代 약 600년 동안 上古 중원 覇者로 군림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先商 민족이 秦漢 시대부터 東夷, 오늘날 중국 동북방에서 일어났고 중원으로 내려와 왕조를 창업했다고도 한다. 훙산 문화를 근거로 많은 중국 내 학자들도 동의했고 얼리터우와 같은 시대에는 샤자뎬 하층과 웨스 문화만이 얼리터우를 정복할 법한 세력을 갖추었다. 전래 문헌에도 王亥-上甲微 父子 시대에 허베이 易水에까지 이르렀다고 하는데 마침 이 시대에 샤자뎬 하층은 기후가 한랭해져 더는 농사를 지을 수 없어졌다. 샤자뎬 하층 원주민들은 허베이 북부로 내려와 다챠터우大垞頭 문화로 룽산 문화를 대체했는데, 世本에 의하면 商族 시조 契이 蕃에 근거지를 정했다고 하고 다챠터우가 옛 商族 연고지 亳의 이칭인 것 같다. 여기서 한 갈래가 허난성 중심까지 내려왔는데 그들이 六示 시대 商族인 것 같고 나머지 토착민들은 先燕 문화를 이룩한 것 같다
훙산 문화는, 기원전 70세기부터 네이멍구 츠펑 우한치 샤오허시 문화에서 발원하여 만리장성 너머 族群의 젖줄이 되었고 옥기 문화도 이곳에서 발원하여 중원 禮器에 영향력이 컸다고 평가된다. 遼河 문명으로도 부른다. 遼河 문명은 황허 문명 시초보다 천 년 빠른데 중국 정부는 뒤늦게 이를 발견하고 이곳에서 발견된 玉熊龍을 근거로 훙산 문화권을 부랴부랴 黄帝(有熊氏) 시대 영토로 명명했으나 이미 黄帝 전승은 허난성을 가리키고 중원은 예부터 만리장성을 쌓아 경계로 삼았으니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다
얼리터우와 같은 시대에 遼河 문명권에서는 청동기 샤자뎬 하층문화가 나타났는데 이 청동기 문화는 얼리터우 시대보다 약 300년 빠르다. 商代 청동기는 전 세계 학계에서도 인정할 만큼 정교한데 학자들은 이를 훙산-샤자뎬 하층 토기 문양에서 이어졌다고 평가한다. 商代 청동기는 얼리터우 시대 기술도 그대로 가져갔겠지만 얼리터우 청동기는 처리가 아직 미숙해 표면이 얇고 무늬를 장식하지 못해서, 어딘가에서 銅器를 다루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정교한 청동기를 제조할 수 있었을 것이다(殷商 시대 것을 기준으로). 훙산 문화권은 양사오에서 彩陶를 수입해 양사오 못지않은 彩陶 문화를 이룩했는데 학자들은 은허 청동기 문양이 훙산-샤자뎬 하층 彩陶에서 이어졌다고 평가한다
은허 귀족무덤에서 발굴된 인종도 古 화북형이 아니라 古 동북형이다. 은허 왕궁은 특이하게도 동북을 향했는데 이를 상나라 정벌에서는 洹水와, 태양이 뜨는 동쪽을 바라보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갑골문에서 河를 최고 조상신으로서 高祖란 존호를 바친 구절이 보여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귀족(왕족과, 왕실에서 독립한 고위층으로 왕실에서 나와 지방 제후가 되었는데 史記에 黄帝家 사람들이 떨어져 나와 氏를 얻고 각자의 나라를 세웠다는 기록의 근거가 되고 신석기 문화 여러 유형들도 이를 반영한다) 인종으로 보아, 殷商 시대 전 옌스와 정저우 商城(고서에는 商 왕실이 殷商 시대에 이르기까지 5번이나 도읍을 바꿔 다녔다고 쓰였고 임시 도읍으로 정해졌을 商代 遺址도 보이지만 고고발굴 결과 실제 도읍은 옌스와 정저우 商城 사이만 돌아다닌 것 같다) 왕궁 방향도 동북을 향했음에서 보아 商代 왕실과 귀족들이 동북방의 향수로 왕궁 방향을 정했다는 학설 또한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扶余가 夏歴과 周歴 그리고 秦歴도 아니고 殷歴을 채택한 기록도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며 禮記에는 商人이 白色을 숭상했다고 쓰였는데 은허에서도 제사에 人牲도, 가축도 흰 것이 주로 바쳐지고 商代 토기도 白陶, 귀족 무덤 옷도 白衣가 주되었음이 증명되었는데 이 白色은 다름이 아니라 白衣 민족 한민족 主色이다. 아마 옥제품을 통해 白色을 숭상하며 스스로를 天孫으로 믿었던 것 같은데 옥제품은 훙산 문화권에서 개발되었다
거북 등껍질은 모르겠으나 소 견갑골로 점복을 하는 습속도 룽산 문화보다 천 년 앞서 遼河 문명권에서 나타났음이 밝혀졌고, 갑골에 새겨진 신화와 역사에 의하면 동북방 민족은 점복에 글자를 새긴 派(商族)와 점복만 한 派(한민족)가 각각 서와 동으로 흩어지면서 혈통이 갈라졌다고 밝혔다. 따라서 商族은 중원에서 토착민들과 함께 갑골문을 창조했지만 한민족은 점복에 글자를 남기지 않았기에 고조선은 물론 고대 왕국들 기록이 부실하고 중국 측 사료에 처음으로 기록이 된 것 같다. 어순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고 하고 갑골문 어순은 현대 중국어 어순과 같지만 商族은 왕조 시대를 영위하는 동안 중원 토착민들 사이에 동화되었을 수도 있다. 上古 사회는 상상 이상으로 복잡하다
코리안 루트를 찾아서에서는 武丁의 배우자로,  그 유명한 여장부 婦好의 무덤 위 享堂도 적석총 꼭대기의 享堂을 가져갔다고 밝혔다
이 또한 고려해보아야 할 것이다. https://jabjabjab367.tistory.com/m/75

제곡帝喾은 女神인가

帝喾은 商族의 元祖로 알려진 대륙의 창세 신화 속 임금 또는 동방의 천제 帝俊이라고도 한다. 갑골학자들에 따르면 그는 갑골문의 夒 또는 夔에서 나왔다. 夒자와 夔자는 오늘날 필체도 같아서

jabjabjab367.tistory.com

다만 箕子朝鮮은 先秦 문헌에는 기록이 보이지 않아 한민족 역사 시원을 중화사상에 편입시키기 위해 시도되었을 것이고 箕侯가 새겨진 銘文은 중원에서 더 많이 발견되었으므로 부정된다


이렇듯 商族 族原은 학설이 서로 다르고 통일되지 않았다. 윤내현이 역설했듯 華夏民이지만 허난성에서 다소 동방에 치우쳐 東夷 요소를 적극 흡수했다는 설도 설득력이 강하고 산둥에서 왔다는 설도 신빙성이 높다
그러나 고고발굴로 나타난 모든 정황상 商族이 遼河 문명과 모종의 연관이 있음이 뚜렷하고 심지어 궈다순 등 많은 중국 내 학자들조차 이에 동의한다. 비록 샤자뎬 하층문화를 고조선 시대라고까지 하긴 무리가 매우 크고 商族이 한민족 직계 선조는 아닌 것 같지만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했다. 商族을 遼河 문명 후예로 확정 짓기만 해도 중화사상은 제법 무력화될 것이다  

728x90
반응형

'역사와 인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遼河 문명과 한민족  (0) 2024.07.05
武丁의 중흥  (2) 2024.06.16
얼리터우二里頭, 대륙 先史와 역사시대 경계선  (0) 2024.05.31
五帝 논란 종결  (0) 2024.05.15
三皇 논란 종결  (0) 2024.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