夏 왕조의 의문

2021. 11. 26. 15:21역사와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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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에서 가장 이른 역사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書經부터 시작해 國語, 竹書紀年, 戦國策 등 그리고 史記에서는 대륙의 첫 번째 왕조를 夏朝로 전한다. 갑골문이 세상에 나타나고 은허가 발굴되면서 商 왕조의 존재가 인정되었고 왕가의 세계世系까지 史記 殷本紀와 거의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중국 정부에서는 夏朝의 흔적(夏虚)도 찾아내 존재를 인정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중국과 끽해야 한국만이 夏朝의 실존을 억지로 인정하지 서양 사학계와 의고학파에서는 夏朝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얼리터우二里頭를 夏代 유적이라고 뚜렷이 말할 수 없다
얼리터우는 기원전 1800년경부터 허난성 산먼샤三門峡에서부터 일어나 山四 펀수이汾水로 그리고 허난성 동남부로까지 퍼지는데 산면샤부터 펀수이까지 1, 2기고 그로부터 기원전 1500년경까지는 3, 4기로 나뉜다. 그러나 1, 2기는 아직 신석기시대고 夏代는 청동기 시대인데 인류 역사에서 국가는 청동기 시대부터 이뤄졌고 청동기 3, 4기에는 夏代보다 뚜렷한 商代가 들어섰다

2. 商代 갑골문에는 夏 왕조는 물론 夏자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 하나로 끝난다
전근대 모든 문헌에서는 성탕成湯이 夏朝를 멸하고 商朝를 건국했다고 전하는데 成湯은 갑골문에서도 大乙, 唐 등으로 불리고 공적도 적잖게 기려졌지만 그가 夏代를 뒤엎은 기록은 지금까지 어디에도 없다. 만약 夏와 같은 강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열었다면 商 왕실은 틀림없이 갑골문에 그를 기렸을 것이며 商代에는 미신을 섬겼으니 夏 왕실의 망령을 달래기 위해 제사를 지냈을 텐데 그런 기록은 아직까지 하나도 없다
또한 갑골문에서는 夏자조차 보이지 않는데 대륙의 신석기시대부터 商代까지는 한 해를 春과 秋로만 불렀고 夏와 冬은 없었다. 때문에 魯國 역사책을 春秋라고 했다. 간혹 갑골문에서 夏자를 찾았다고도 하지만 그건 아마 周代 갑골문이나 청동문에서 나와 지명으로나 불린 것 같다


3. 史記 夏本紀의 출처 또한 뚜렷하지 않다
사마천은 거의 書經을 베껴 史記를 썼는데 古文은 분서갱유로 이미 사라져 今文을 베꼈지만 今文은 위작으로 밝혀졌다

4. 위와 같은 이유로 오늘날의 학자들은 周 왕실 그를 중심으로 한 유가 학자들이 정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夏朝를 지어내 商族에 무너진 것에 빗대었다고 밝힌다
夏商이 무너지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똑같은데 폭군이 나타나 폭정을 하고 여색을 밝혀 나라가 망했다고 한다. 夏桀과 紂는 동양에서 폭군의 대명사로 알려졌고 각각 末姫와 妲己에 빠져 살았다고 하는데 紂라고 내리 깎인 商代 마지막 왕 帝辛을 고고자료 갑골문에 맞추면 오히려 고문헌과는 다르게 진보파로 낡은 관습을 허물고 나라의 힘을 왕가로 모았으며 바깥으로 크게 영토를 넓혔다고 하고 商朝는 帝辛의 폭정 때문이 아니라 대규모 동방 원정에 나선 사이 周族이 빈집을 털면서 무너졌음으로 재발견되었다

나 또한 의고학파를 믿으며 이러한 이유 때문에 夏 왕조의 존재를 부정한다. 뿐만 아니라 夏朝는 고고자료에서부터 부정되는데 중국 정부가 억지로 존재를 인정해 그것으로 중화사상을 완성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경도 그렇고 사기에서도 상고시대를 중앙 집권이 이루어진 한나라에 빗대어 대륙을 구주九州로 나누었지만 고고 사료에 따르면 상고의 대륙은 밀림을 경계로 각자 다른 문화권으로 나뉘어 수많은 각자의 씨족을 이루는 데서 그쳤다(물론 나중에 그 씨족들이 모여 나라가 된다)
때문에 夏 왕조는 지금으로서는 없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전승 속 첫 번째 국가 夏朝가 나타나는 과정은 문헌에서도 당시의 현실이 잘 비추어졌기에 알아볼 만은 하다


夏 왕조는 禹가 열었다고 전해지며 공통된 기록으로는 堯舜시대 대륙 전역에 대홍수가 일자 치수의 공로를 인정받아 정권을 물려받고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禹의 치수는 문헌마다 전승이 다르다
史記 夏本紀에서는 堯의 시대에 禹의 아비 곤鯀이 치수에 실패해 舜이 堯의 뒤를 잇자 그를 처형하고 아들 禹에게 치수를 맡겼다고 한다. 또 신화를 기록한 산해경에서는 鯀이 하늘나라의 보물 식양息襄을 훔쳐 물길을 막자 천제에게 처형되고 3년 동안 주검이 썩지 않고 배에서 생명이 자랐는데 鯀의 배를 기르자 새끼 용 한마리가 태어나니 그가 禹다. 禹는 하늘나라에서 응룡과 여러 용들, 지상에서는 거북 등을 데리고 13년에 걸쳐서 치수를 해낸다
어느 기록에서든 禹는 치수의 영웅으로 섬겨졌으며 禹자도 뱀을 손으로 잡은 모습을 그렸고 뱀 모양의 강물을 정리한 영웅을 뜻한다

또 鯀의 몸에서 禹가 태어나는 신화와 禹가 치수를 하면서 女嬌와 맺어져 아들 啓를 낳았는데 女嬌는 禹가 곰이 되어 바위를 깎는 모습을 보고 禹를 피해 돌이 되었는데 거기에서 禹가 아들만을 꺼낸 신화는 모계사회가 부계사회로 넘어가는 모습을 잘 나타낸다. 夏本紀에서는 女嬌가 啓를 낳아도 禹가 치수에 전념하느라 처자식을 돌보지도 못했다고 하거나 禹가 나라를 열고 啓가 禹의 뒤를 잇는 기록 역시 모권이 부권으로 넘어가면서 세습 왕조가 이루어지는 모습을 잘 나타냈다. 전근대 왕조에서 왕비의 이름은 거의가 전해지지 않는데 아마 그 출처도 산해경 속 禹의 탄생 신화와 계의 출생 신화 또는 역사 문헌 속 禹의 치수 일화일 것이다
또한 최근 학계에서는 夏 왕조가 열렸다는 기원전 2000년경보다 100년 늦은 기원전 1900년경에 대홍수의 흔적이 발견되었고 치수 신화는 아마 그때의 대홍수에서 상상되었을 것이다
https://m.dongascience.com/news.php?idx=13335

4000년 전 중국 대홍수 유적 찾았다!

“거센 홍수가 하늘로 넘치고 거대한 물줄기가 산을 둘러싸고 언덕까지 덮쳤소. 백성들이 매우 걱정하니 홍수를 다스리도록 시킬 사람이 있겠소?” - 요임금, ‘사기 본기’(김원중 옮김)에서

m.dongascience.com



하지만 아직도 夏 왕조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다. 비록 기록은 부실하지만 禹부터 이계履癸(桀)까지 왕가의 계통만은 전해진다. 갑골문 해독의 저자 양동숙 교수는 夏代 또한 신권의 시대라서 14번째 왕 공갑孔甲과 17번째 왕 이계履癸 등은 이름에 십천간을 붙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모든 왕 또는 과반수 이상 왕의 이름에 십천간을 붙여야지 왜 꼭 혼군과 폭군의 이름에만 그랬을까?
당시는 제사가 나라의 중대사였는데 殷本紀에서도 그렇듯 武乙과 帝辛 같이 귀신을 겁내지 않았다는 임금으로부터 황음무도했다던 두 夏王을 지어내지 않았을까? 孔甲과 武乙, 桀과 紂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똑같다

夏代 정치도 그렇다. 史記 本紀에서는 이미 五帝 시대부터 대륙은 중앙 집권이 이루어졌다고 하고 禹의 치수도 九州에 걸쳤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아마 그 시대와 같은 대홍수가 일면 엄청난 적자를 감수하며 막대한 자본과 피땀을 동원해야 할 텐데 원시시대의 기술로 그만한 치수는 절대로 있을 수가 없고 끽해야 동네 치수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시대에는 그 공적조차도 역사에 길이 기억될 만큼 위대했을 것이다. 각 지역의 씨족들, 소수민족들의 동네 치수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주나라와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한나라에 이르러 대륙이 하나로 아우러지면서 그런 치수 신화로 완성되었을 것이다(그런 원시시대에 고문헌과 같은 계몽 군주주의가 자리잡았다면 중국은 이미 漢代에 오늘날의 민주주의를 이루고도 남았다)

왕조가 들어서기 전 치수뿐만 아니라 나라가 열린 지 얼마 안 되어 夏 왕실은 절체절명의 순간까지 가는데 東夷(산둥성) 有窮 부락의 대표 后羿에게 나라를 빼앗긴다. 史記 夏本紀에서는 이를 세 번째 夏王 太康(심지어 商代 갑골문에도 大자만이 있지 太자는 없다)이 나랏일에는 일절 관심이 없어서라고 했지만 기껏해야 夏 왕조는 씨족들이 연맹하여 이루어졌을 것이기 때문에(商代도 그렇다) 실제로는 중앙 정부의 夏族이 지방의 제후로부터 위협을 받다가 그리 되었다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夏本紀에서도 啓가 禹의 뒤를 잇자 有扈 부락이 반기를 들었다고 전한다
그렇기에 夏商 교체기는 夏란 커다란 울타리 안에서 씨족들끼리 대립 밖에 되지 않는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夏가 商으로 옮겨 갔다고도 한다. 左傳 • 昭公 원년과 史記 鄭世家에서도 옛적 高辛氏(帝喾)의 두 아들 閼伯(契이라고도 함)과 実寝(唐에 자리 잡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堯인 것 같기도 하다)의 사이가 아주 나빠 閼伯(을 허난 商丘로, 実寝은 大夏로 옮기니 각각 商族과 夏族이 되었다고도 하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이미 글 첫 장에서 말했듯 은허 갑골문에는 아직까지도 夏 왕실던지 夏자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夏 왕조의 존재는 부정된다. 즉 商朝가 夏朝며 夏朝가 商朝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禹는 누구인가? 禹는 周中 銘文 遂公盨와 豳公盨에서 처음으로 기록이 보이며 史記 夏本紀 속 禹의 치수 기록이 그대로 적혔는데 夏자는 보이지 않는다. 銘文 속의 禹는 인간이 아니라 신인 것 같다. 또 禹는 어디에서 왔는가? 禹의 출신에 대해 가장 유력하게는 楚辞 • 天問에도 전해지듯 羌族이라고 한다. 周代 개국 공신 강태공은 姜姓인데 姜姓은 羌族에서 나왔고 중원인은 그들과 서쪽 변방의 이민족을 戎이라고 불렀고 禹를 戎禹로 부르기도 하니 신빙성이 있다. 史記 六國年表에서도 禹는 西羌에서 일어났다고 밝힌 바 있다

夏는 틀림없이 商의 강적일 텐데 갑골문에도 보이듯 商代의 최대 강적은 羌族이었고, 가장 많이는 천여 명의 포로를 잡아와 제사에 바쳤다고도 한다. 그만큼 羌族은 상나라에 원한이 깊었을 텐데 그때문에 周族과 손을 잡았고 周族가 羌族과 함께, 商에 원한이 깊었던 민족들을 모아 商윽 무너뜨리고 정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나중에 연합한 민족들에서 가장 강했던 羌族의 신앙에서 禹를, 그리고 周代 이념은 火徳이었고 여름이 불과 알맞을 뿐더러 商 왕실이 갑골문에서 섬긴 조상신도 농경의 신위를 지녔으니 그것을 가져와 夏朝와 夏자를 지어낸 것 같기도 하다. 周나라는 商 문명을 그대로 이었고 갑골문 역시 받아들였다
갑골문에 따르면 商과 羌族의 악연은 成湯 시대부터 이어진 것 같다
https://cafe.daum.net/alhc/51qD/1323?q=%EA%B0%91%EA%B3%A8%EB%AC%B8%20%E5%A0%AF&

殷族에 대한 몇가지 통설재고 ( 사견)

황하 문명에 대한 사기 제자백가 춘추 좌전 등 춘추전국시대 기록된 문헌에 기록된것이사실이라고 한다면 기원전 5000년경에 복희같은 수학바코드 창시자가 출현하고 삼황오제같은 실존인물이

cafe.daum.net


그렇다고 夏 왕조의 전설이 아예 근거가 없지만도 않다. 비록 고문헌에 쓰인 상고사가 굉장히 부풀려졌고 갑골문, 금문 등과 같은 뚜렷한 고고자료가 나타나면서 고대의 환상이 더 많이 깨졌지만 書經 등이 원시시대로부터 사람들의 전승에 의해 쓰였고 사마천도 그에 근거해 史記를 썼으며 고고자료도 그를 많이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대륙은 황허와 창강으로 이어졌고 강가에서 문명이 이루어졌으며 신석기시대는 전근대 농경 사회의 첫 발걸음이므로 강물의 범람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악몽과도 같았을 것이며 그를 이겨내면 영웅이 되어 권력을 얻어 나라를 이루었으니 그게 夏朝의 신화나 商朝가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夏朝의 뒤를 이었다는 商朝의 문자 갑골문에서 아직까지도 夏자가 일절 보이지 않는다는 데서 이미 夏 완조의 실존 여부가 정해진다. 물론 갑골문은 거의가 왕이 제사를 지내며 나라의 중대사를 조상신에게 물은 내용을 담았지만 夏와 같은 강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열었다면 商代는 신권의 시대므로 그 망령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夏 왕실에 제사를 지냈을 텐데 그런 내용은 아직까지 하나도 없다. 그러니 商代보다 앞선 시대에 나라나 부락의 이름을 夏로 지었을 리는 만무하다. 게다가 앞으로도 인류의 문명은 나날이 커지겠지만 오늘날의 기술로도 충분히 고고자료를 찾아 고문헌을 증명할 수 있는데 지금까지도 夏朝의 물증은 보이지 않으니. 게다가 문자로 이루어진 모든 전근대 중화 문명은 商 문명이 뿌리인데 夏 문명으로 전해지는 것들이 들어갈 자리 역시 없다

하지만 모른다. 미래에는 夏朝의 물증이 나올지도 모른다. 물론 뚜렷한 문자가 적힌 유물이 나타나야겠지만. 만약 가까운 미래에도 물증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먼 미래에 시간 여행기를 타고 그 시대로 돌아가는 수밖에는 없다. 夏 왕조의 실존 여부는 세상 만물만이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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