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리터우와 夏王朝
얼리터우는 대륙 最古의 청동기 遺址로 학계에 의해 대개 夏代 古都로 추정된다. 나는 원래 夏代의 존재를 강력히 부정했는데 商代 갑골문에 夏代와 관련된 기록은 물론 夏자조차 보이지 않는 연유에서였다(三皇五帝도 매한가지). 따라서 아직까지 신석기시대에서 못 벗어난 1, 2기와 청동기시대로 들어선 3, 4기를 따로 구분해 조심히 얼리터우 3, 4기가 商 문화임을 인증하기 위해 노력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작년에 출간되어 사학계를 강타한 리숴 박사의 상나라 정벌(翦商)이 내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바꾸었다

학계에서 夏 문화로 추측하는 얼리터우와 商 문화로 알려진 二里崗 유적 사이에는 문화가 교체된 흔적이 뚜렷하고, 얼리터우 최상층에도 대규모 충돌의 잔재가 남아 정복자에게 점령당한 흔적이 보인다. 따라서 얼리터우 全代 문화는 신석기와 청동기시대의 차이일 뿐, 양상은 일관되고 전래문헌상 夏代 기록과 얼리터우 문화의 연관성도 많이 증명되었다
다만 商代 갑골문에 夏자가 보이지 않고 당대 1년을 春夏秋冬이 아닌 春秋로만 구분했으므로 그 전대 국호를 夏라고 할 수 없을 뿐이다. 또한 갑골문이 전대 역사 기록이 아니라 당대 점복 기록이 압도적인 것도 감안해야 하고 얼리터우에서도 문자 유물이라고는 도기에 새겨진 원시 부호밖에 발견되지 않았다
비록 리숴 박사는 魏晋南北朝 전문가로 특히 商周 교체기 무렵에 사료로 검증되지 않는 부분, 가령 고대인의 감정과 같은 확신할 수 없는 일방적인 가설을 내세워 일각에서는 비판이 많다. 그럼에도 서장 夏代 얼리터우 全史는 고고자료와 학술 성과를 바탕으로 했으므로 신빙성이 높고, 여태까지 이러한 저서가 없었다
원래 史記 三代世表에 禹가 西羌에서 일어났고 匈奴列傳에 匈奴가 夏 왕실 후손이란 기록을 근거로 얼리터우의 주체 夏族을 서토 유목민 출신으로 추정한 적도 있으나 연구 결과 위 문헌 기록은 山海經에 黃帝의 자손이 白犬 암수 한 마리씩 낳았는데 이들이 犬戎 및 西戎이 되었다고 하듯이 중국 중심 역사관을 갖다 붙이려는 견해가 지배적이라 설득력이 매우 낮다
대홍수와 치수 신화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고 고고발굴로 밝혀진 바 先夏民은 뤄허 유역 토착민은 아니나 옌스 얼리터우에서 동남으로 100여 킬로미터 떨어진 新砦 취락 출신으로, 이 新砦에서 돼지 모양 토기 덮개가 자주 사용되었고 얼리터우 시대 제사의 주요 제물 돼지와 연관 지어 여느 신석기 문화처럼 농경민으로서 정체성이 짙다
얼리터우 귀족 무덤에서는 龍 문양 기물이 발견되어 山海經 속 禹의 치수 신화와 史記 夏本紀 孔甲 시대 기록처럼 龍과 夏 왕실의 친연성이 증명되었는데 이는 당대 기후와, 취락지가 물가에 자리 잡았던 환경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新砦에서도 龍 문양 토기 파편들이 발굴된 데 이어 얼리터우 유형 토기와 친연성이 발견되어 아니 그러해도 夏代로 비정하던 얼리터우 유적 연대가 史記에서 말하는 夏代 연도와 차이가 있어 고민하던 일부 중국 사학자들은 이곳을 夏初 도읍으로 추측하기도 하나 이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新砦 취락은 기원전 20세기에 영위했고 이곳과 얼리터우 사이는 허난 덩펑시 嵩山으로 가로막혔는데 이곳에 위치한 기원전 21세기 王城崗 古城은 禹의 아비 鯀이 崇伯이란 전승과 맞물려 先夏 유적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당시 新砦 인구 수천 명으로는 아직까지 광활한 동부 대평원을 개척하긴 역부족이라 서부 뤄허 유역 옌스로 이동했고, 면적이 유한한 이곳 분지 아래 얼리터우를 개척했다
史記 夏本紀에 大禹가 조수 伯益에게 일러 백성에게 볍씨를 나눠주어 습한 저지대에 심으라고 지시한 대목이 증명하듯 그들도 옌스 얼리터우에 벼농사를 도입하고 무논을 개간함으로써 전승상 最古 왕조가 건립되었다. 얼리터우 개막 연도는 기원전 19세기 전후로 기원전 16세기까지 약 4세기를 영위했고 夏를 건립했다는 禹의 도읍으로 전해지는 安邑은 山西 夏県으로 고서와는 차이가 있다
아직 얼리터우 早期까지는 석기가 지배적이고 청동품은 희귀했는데 룽산 시대를 이어 도기는 黑陶가 주류였고 灰陶도 일부 보인다. 그밖에 생활용품 碗(그릇), 盤(밥상, 쟁반), 杯(술잔), 缶(물동이), 缸(항아리) 등과 早期 대표 도기용품 鼎, 爵, 豆, 尊 등은 청동기로 이어졌다. 다만 청동기 표면 처리는 商代에 비해 미숙했다. 얼리터우 유형 청동기 鼎은 왕권의 상징이 되었고 爵은 同姓 귀족 및 신하에게, 후대에는 異姓 제후에게도 주어져 爵位란 호칭이 마련되었다
史記 亀策列傳에 의하면 夏代에도 亀甲占을 쳤다고 하는데, 비록 卜甲 유물은 보이지 않으나 얼리터우 早期에도 불로 구운 듯한 소와 양 견갑골로 미루어 보아 얼리터우 시대-夏代에도 룽산 시대를 이어 점복이 성행했을 것임이 추측된다
2기부터는 펀수이 유역 山西 남부 夏県까지 나아가 그곳에 둥샤펑 유형을 건설하면서 청동기 제조용 구리를 확보하기 위한 거점이 되었다. 帝王世紀에 禹의 嫡子 啓가 재위 35년에 西夏를 점령했다고 하는 대목이 바로 둥샤펑 유형 하층을 지목하고, 西夏가 고대에 晋南이자 오늘날 山西다
이 시대부터 얼리터우는 계급 사회와 청동기시대의 가교를 완성했고 허베이 북부 샤치유안 및 허난 남부 후이웨이와 산둥 웨스 세력과 충돌하게 되는데, 특히 산둥 웨스는 고서에 夏 왕실이 東夷 有窮 대표 后羿에게 나라를 빼앗긴 적 있다는 기록이 보이듯 얼리터우와 함께 청동기시대를 양분했다. 이러한 역사를 실제로 경험해서인지 얼리터우 시대에는 외래 문화권에 폐쇄되었다
따라서 夏代까지는 異姓 봉건 제후가 없었고 덕분에 외래 민족에 개의치 아니하고 夏本紀에 기록된 王統世系처럼 적장자에게 평화로운 왕위 교체가 가능했던 것 같다
얼리터우 末代(기원전 16세기)에 들어서는 점점 외래인의 침략에 피폐화되다가 후반 반세기에 들어 끝내 商族에 점령당했고, 商族 대표 大乙(商代 창업의 主 唐, 商湯)은 商王朝를 창업했다. 얼리터우의 문자 유물 부재로 史記 기록 같은 夏代 王統世系는 입증할 수 없으므로 夏 멸망은 湯의 伐桀에서 唐이 얼리터우를 점령했음으로 표현을 바꿔야 할 것이다
얼리터우 시대 궁궐 청동 작업장은 따로 담장에 둘러싸여 격리되었고 상나라 정벌에 의하면, 이는 청동 수공업자들 얼리터우 정권층에 귀속되지 않고 그들과 분화되어 공존했던 것 같다. 얼리터우 정권층은 청동 수공업자들로부터 제조된 청동기를 독점해 권력을 농단했고 이에 청동 수공업자들은 동방 商族과 밀회하며 그들에게 자잘한 청동 기술을 유출시켰다
얼리터우 末代는 商代 개국 初와 겹치고 이 최상층 유적이 商 문화 정저우 얼리강으로 이어지므로 多亳 중 하나, 西亳으로 추정되기도 하나 商族과 외래인에 점령당한 상흔이 이곳저곳에 남아 신생 왕조의 도읍으로는 부적합하다. 따라서 成唐이 얼리터우를 정복하고 東으로 8km 떨어진 곳에 건설한 옌스 商城이 商代 第一 도읍 亳으로 가장 유력하다
얼리터우 최상층 유적은 亳이 완공되기 전 임시 도읍이었을 수 있고(중국 夏王朝에 대한 간략한 이해 인용), 大甲이 伊尹에 의해 감금되었다고 전해지는 별궁 桐宮으로 쓰였을 수도 있다
정복자 商族은 얼리터우 잔존 세력에 대해서는 고서에 夏 왕실 종친이 제후로 봉해졌다는 기록이 있듯이 청동 수공업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잠시나마 제자리를 보장해 청동기 작업장을 얼리터우 古城에 두었다. 옌스 商城 안에는 옛 얼리터우 정권층이 체류되었고 공장 대신 창고가 즐비했다. 얼리터우 古城은 商族에 점령당하고도 독자의 토기를 생산하며 명맥을 유지했으나 정저우 商城으로 천도하면서부터 商 王都 안에도 청동기 제련소 및 공장이 즐비해지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얼리터우 전대에도 이미 허난성에는 신석기 문화들이 즐비했으나 얼리터우가 뤄양 분지에 개척되면서부터 허난성은 중화 문명의 발상지가 되었다. 얼리터우가 중국 왕조 시대의 서막을 장식했으므로 夏代가 누락되면 선사시대와 商代 간 공백이 너무 길어진다. 다음에는 夏代 編年史를 추론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