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인문학

商代 先王 가족 관계

다음족 2024. 7. 28. 0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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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골 四堂 두 번째 観堂 왕궈웨이에 의하면 商代에는 적장자 왕위 계승법이 없었다. 이는 史記 殷本紀에 의거했고 四堂 세 번째 둥쭤빈도 이에 따라 商代 先公先王 계보를 정리했다. 비록 전래 문헌 기록이 갑골문과 고고자료가 발굴됨에 따라 신뢰도가 인정되어 上古史가 고고자료로만으로는 증명될 수 없고 고문헌과 교차 검증해야 하지만 고문헌 오류는 끊임없이 지적된다. 商代 제례 갑골에서 先王 가족 관계는 일일이 언급되지가 않았지만 제례 순서를 고문헌과 대조함으로써 유추되었다. 따라서 고문헌도 중요하지만 1차 사료 갑골문이 우선이 되어야 할 것이다



大示(직계) 및 준 직계는 전기에는 大, 中, 小(商代 諡法이 오늘날 중국에서 사람을 나이에 따라 大, 中, 小로 구분하는 연원이 되었다), 祖, 報, 示, 上, 下 등으로 일정히 그리고 후기에는 武, 文, 康 등으로 간략히 구분했고 小示(방계)는 外, 南, 虎, 呂, 戔, 羌, 般 등으로 구분했다(갑골문 묘호에서 방계에 虎, 羌 등 方族名이 붙여진 것은 직계와 방계를 구분하기 위해 수식어로만 쓰인 것 같고 후대 문헌에 이들 이름이 와전된 이유는 華夏民은 모두 黄帝 혈통 아래 묶여야 하는데 자칫 이들 명칭으로 인해 역사 창조 작업에 불순물이 들어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6대 小甲은 전래 문헌에 따라 大庚의 장남이자 大戊-呂己 형제 형이 되는데 小甲이 大戊에게 적장자 왕위 계승에서 밀려난 이유는 후술 한다
준 직계 羌甲-南庚 父子는 卜辞에서 羌甲이 배우자 妣庚과 함께 제사됨으로써 史記 殷本紀 기록이 증명되었고 外丙도 배우자 妣甲과 제사되었는데 南壬(仲壬)이 그 아들로 보이고 즉위 못 한 것 같은데 구분은 卜辞 속 奭과 母로 짓는다

윤내현 商王朝史의 研究에서

따라서, 왕궈웨이에 의하면 商代에는 적장자 왕위 계승법이 따로 없었고 후기부터 정착되었으나 나는 지금까지 자료를 동원해 商代에도 이미 적장자 왕위 계승법이 있었음을 역설한다. 이는 近祖先公 六示 시대에 商 왕실이 완성되고 商 왕조 창업주 大乙과 그 아들과 손자 大丁, 大甲 시대까지 유지되었다. 비록 연맹 씨족들 신앙이 갑골로 제사되어 후대 문헌에 역대 商族 대표로 가작되었음에 불과하지만 전래 문헌 先商 대표들이 父子 간에 세대를 교체한 것도 그 근거가 되니, 즉 적장자 계승은 신석기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왔다. 그러던 것이 大甲이 적장자 大庚이 아직 어려 현명하지 못하고 成湯의 창업 배경으로 인해 왕실 권위가 확고하지 않으므로 안전장치로 아우 外丙에게 왕위를 계승시키면서 王弟와 적장자 간 왕위 알력의 첫 단추가 끼워졌고 방계 先王도 자기 嫡子에게 왕위를 계승시키고자 했다
沃丁으로 보이는 卜辞 속 虎丁(虎祖丁)도 史記 殷本紀에는 大庚의 형으로 전해지나 반대일 가능성이 더 큰데 大示와 小示는 바쳐진 묘호로 구분되었고 商代에도 엄연히 적장자 왕위 계승법이 유효했으며 제례 갑골이 해독되면서 고문헌에서 大乙의 차남 外丙은 사실 大丁의 차남이고, 고문헌의 呂己-大戊 형제도 갑골 제례 순서에 의하면 大戊가 형이 된다(下乙, 祖乙이 적장자 祖辛에게 곧바로 왕위를 계승시켜 中宗이란 존호가 바쳐진 것이 尙書와 史記 殷本紀에서는 大戊가 되었다). 虎祖丁이 형이었으면 그의 적장자가 大庚 뒤를 이어야 했는데 大庚 뒤로는 그의 三男들이 차례로 즉위해 大庚이 先妣와 함께 제사되었다. 또한 虎祖丁도 殷本紀와는 달리 즉위 못 한 것 같다. 재위 여부는卜辞에서 제물이 바쳐진 여부로 정해진다

小甲이 大戊에게 적장자 왕위 계승권에서 밀려난 이유는 다음과 같다. 商代 왕실은 연맹 씨족 및 다민족을 商 왕실 정치 아래 두기 위해 잔혹한 제례 인신공양을 채택했는데 상나라 정벌에 의하면 商初에서 중기로 넘어갈 때 잔혹한 제례를 폐지하고자 개혁 운동이 있었고 人牲 대신 청동기를 매장해 제사를 하고 인두개골 가공 작업을 중단했는데 상나라 정벌에서는 그 개혁 운동 주체를 7대 大戊로 지목했다. 그러나 개혁 운동은 실패했고 개혁파는 구차하게 목숨을 유지하다가 소멸했는데 大戊는 적장자 中丁에게 무사히 왕위를 계승시켰기에 그가 개혁 운동 주체가 될 수 없고 大戊의 형 小甲이 개혁파였을 것이다. 다만 이 개혁 운동은 大戊-中丁 父子 시대에도 어느 정도 인용된 것 같은데 전래 문헌에서 大戊는 仁君으로 전해진다. 小甲은 祖甲 시대 제례 개혁으로 모든 방계 先王과 함께 부활했다



商代 왕위 계승은 후기 小乙-武丁 父子 시대에 기존 왕실 법도를 과감히 깨고 季子가 적장자에게 왕위를 계승시켜 왕실 법도가 변혁되었고 그를 바탕으로 祖甲이 제사를 개혁하면서 적장자 왕위 계승법이 공고해졌다. 이는 갑골문 제례 순서에 의한 王統 世系로도 증명이 되니 商 전기에 적장자 왕위 계승법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아니한다. 고서에 보이는 小乙-武丁 父子 시대로부터 왕위 계승 변혁과, * 그 전대 下乙에게 中宗이란 존호가 갑골문으로 직접 바쳐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商代 先公先王 첫머리이자 商 왕실 開祖는 전래 문헌에 諱가 微로 기록된 上甲인데 그 6대손이 商 왕조 창업주 高祖 大乙로, 大乙에서부터 小乙 시대에 이르기까지 商王 묘호에 乙은 中宗 祖乙에게만 추존되었다. 당대 商 왕실은 王弟와 적장자 간 왕위 알력으로 시끄러웠는데(상단 世系図 참조) 下乙은 왕위를 적장자 祖辛에게 바로 계승시켜 그의 시대에 잠시나마 왕실 정국을 안정시킨 공적으로 그에게 中宗이란 존호가 바쳐짐과 함께 商 왕실 시조 上甲 시호에 대조해 下가 시호로 정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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