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인문학

遼河 문명과 한민족

다음족 2024. 7. 5.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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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 황허 문명은 지금까지 세계 4대 문명에 들었다. 그런데 중국 동북 방면에서 황허 문명보다 약 2천 년 앞선 신석기문화가 발굴되었다. 遼河 유역에서 일어나 遼河 문명으로 불린다. 이곳은 다름이 아니라 예부터 중원인들이 만리장성을 둘러치고 그 너머로 오랑캐(東夷) 본거지로 불렀다
그런데 황허 문화권보다 더 앞선 시대에 그 오랑캐 땅에서 황허 문명마저 압도될 만한 신석기문화가 나타났다. 이에 중국 정부는 훙산 시대 玉熊龍을 근거로 이를 부랴부랴 有熊氏 黄帝 시대 도읍으로 공표했으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다(물론 遼河 문명도 중국 정부에서 명명했다). 華夏 민족 開祖 黄帝의 근거지는 전승상 이미 예부터 허난 정저우 新鄭市를 가리키고 有熊은 그저 국호 또는 지명일 뿐이며 예로부터 곰 신앙은 중원과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 熊자는 雄자와도 호환된다. 비록 옥제품이 중원 禮器에 영향력이 컸다고 평가되나, 유전자상으로나 유물로나 遼河 문명과 황허 문화권은 뿌리부터가 다르다(물론 遼河 문명권에도 이곳 선주민 古 동북형과 함께 오늘날 중국인의 혈통상 선조 古 화북형이 섞였고 先史 시대에는 국경 없이 만주, 한반도, 대륙, 몽골, 시베리아 모든 문화가 똬리를 틀고 엉켰다). 遼河 문명의 직계 후손은 한민족과 만주 諸族이다. 따라서 이형구의 코리안 루트를 찾아서에 의하면 발해 연안문명으로 재명명되어야 한다


이에 국내 재야사학자들은 신석기~청동기 遼河 문명을 모두 고조선 영역으로 아우른다. 선문대 이형구 교수와 이기환 기자의 코리안 루트를 찾아서는 재야사학계보다는 온건파이나 그럼에도 遼河 서부 문화권까지 모두 고조선 것으로 아울렀다. 너무 성급하지 아니하다 할 수 없다
물론 이형구 교수와 코리안 루트를 찾아서의 공적은 지대하다. 원래 한반도 빗살무늬 토기는 유라시아에서 시베리아를 거쳐 한반도로 유입된 북방전래설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연구가 거듭된 결과 근래에 들어 차하이-싱룽와 시대(기원전 65세기~62세기) 遼河 유역에서 먼저 자생했을 것임에 설득력이 기울어졌고 시베리아 것은 그보다 천 년 이상 늦고 무늬를 새기는 방법과 그릇 모양 등도 遼河 다링허 유역 및 네이멍구 것과 계통이 다름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遼河 서부 빗살무늬 토기가 동부로 건너와 한반도에까지 들어왔을 것이다
또한 코리안 루트를 찾아서 탐사대는 15만 년 전 아프리카 인류 기원설을 뒤엎고 28만 년 전 遼東 반도 진뉴산인을 고증했다

그러나 아무런 근거도 없이 랴오닝성 훙산 뉴허량에서 여신상과 함께 곰 하악골이 발견되었다고 아전인수 식으로 이를 단군 신화 속 熊女와 연결했다. 또 기존 玉猪龍을 중국 정부에서 玉熊龍으로 재명명한 것을 수용해 아전인수 식으로 해석했다

玉猪龍이 玉熊龍이 되었지만 아무리 봐도 돼지 모양이고 오른편은 늑대로도 보인다

그러나 훙산 시대에는 지금보다 온난다습해 농경에 적합했다. 고대 농경 사회에서는 돼지가 신으로 섬겨졌는데 그건 훙산 문화도 마찬가지였고 이미 싱룽와와 자오바오거우 시대(중석기시대)부터 동물 뼈는 돼지, 사슴과 고라니 것이 가장 많았고 사람 무덤(상류층의)에도 돼지가 완전하게 순장되었다. 즉 곰은 주류가 아니었다
농경 사회에서 곰과 여신의 상징성은 생명, 부활, 재생이다. 곡식을 거두어들여 혹독한 겨울을 견뎌내고 봄이 되면 다시 싹이 트는 농경민족 상징이 곰이다. 농경민족에게 곰은 그러한 재생의 상징이지 토템이 아니다. 대개 토템을 오해하는데 토템 조건은 경외심으로, 토템에 공포를 느끼는 한편 사냥해 지배해야 한다. 중석기시대(구석기와 신석기 사이 과도기)부터 농경인들 토템은 집돼지 조상 멧돼지지 곰이 아니었다. 멧돼지로부터 猪突的이란 언어가 나왔듯 오늘날에도 그러한데 멧돼지의 저돌성과 어금니가 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이렇듯 토템은 씨족과 친연성이 있어야 하는데 훙산인들은 돼지와 그러했지 곰과는 그러하지 않았다
곰은 시라무렌 이북 삼림 수렵인들 토템이다. 비록 先史 시대에는 국경이 없어 훙산 농경인들이 곰을 보았을 가능성이 있고 훙산 곰의 상징성이 以東으로 건너왔을 수는 있으나, 그 흔적만으로 훙산 여신상이 熊女가 될 수는 없다. 게다가 훙산 시대는 기원전 45세기부터 31세기로 熊女 시대와는 연대가 한참 멀다(여기까지는 동북아 곰 신화와 중화주의 신화론 비판의 김선자 박사 편 인용)
훙산의 돼지 머리 玉人을 근거로 중국 정부는 이를 黄帝에 이어 顓頊 시대 도읍으로 임의로 정했다. 그러나 고문헌상 顓頊의 전승은 蜀, 오늘날 쓰촨에서 전해지고 그의 도읍도 허난 북동쪽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세계 어느 신화에서나 인간과 토템은 혼합되어 나타난다. 顓頊이 玄帝, 북방 상제로도 전해지긴 하나 이는 후세의 가작일 것이다

또 차하이 용 돌무더기를 근거로 용이 東夷 전유물이라고 했다. 근래 들어 용은 중국 전유물과는 거리가 좀 멂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또 다른 고고자료로 보아 대륙의 龍도 본토에서 자생했고, 한반도 용은 차하이에서 전래된 것 같다

차하이 용 돌무더기

훙산 시대에 이어 청동기 샤자뎬 하층을 고조선 도읍이라고 했는데 단군의 도읍 아사달은 한반도 以北에서 전승이 전해져 내려오니 그곳과 遼東 반도에서 찾아야지 遼河 以西 샤자뎬 하층과는 무관하고, 기후가 한랭해져 쇠퇴한 것도 누락시켰다. 게다가 遼河 以東의 무덤 양식은 고인돌이지만 샤자뎬 하층에서는 彩陶나 나무 판재로 무덤곽을 짜 매장했다. 훙산 문화권은 商族을 彩陶 원산지 양사오 문화에서 그것을 수입해 샤자뎬 하층 시대에 이르기까지 양사오 문화 못지않게 彩陶 문화권이었다
商族을 단군조선 일파라고 했는데, 遼河 문명 및 훙산 문화는 틀림없이 고대 한민족의 젖줄이다. 商代 귀족들이 오늘날 한국인들과 마찬가지로 古 동북형이며 전래 문헌에 白色을 숭상했다고 하듯 고고자료로도 제사에 흰 제물을 주로 바쳤고 의복도 白衣가 지배적이었으니 어쩌면 商族과 한민족의 뿌리는 같을 수 있다. 遼河 문명권에서 개발한 옥기도 한반도에서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 그러나 商族은 갑골에 글자를 새기며 남하했고 한민족은 無字 갑골을 유지한 채 동진하면서 다시 派가 갈린다. 이로 인해 고조선 기록이 중원 측 문헌에서 먼저 나타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
윤내현 등 재야사학자들은 비파형 동검 지대를 근거로 고조선이 약 2300년 동안 全 만주를 아울렀다고 하나 遼河 以西와 以東 문화가 이렇듯 각기 다르니 도저히 이치에 맞질 않는다. 게다가 샤자뎬 상층은 만주족 조상 山戎과 유목민 조상 東胡의 무대다. 이마저 고조선 강역이라고 하면 만주족과 유목민들 역사는 삭제해야만 한다

국내 재야사학자들이 말하는 고조선 강역

고조선이 燕将 秦開와 부딪혀 서방 2천 리 땅을 잃었다고 하듯이 고조선은 遼河 以西로도 시대를 거쳐 세력을 뻗쳤을 것이다


뒤이어 箕子朝鮮을 수용했다. 商代 末王 帝辛의 숙부 箕子는 商 멸망 뒤 朝鮮으로 떠났다고 전해지는데 이를 그의 商族이 본향으로 돌아갔다고 해석한다. 다링허 유역 카줘에서 㠱侯 銘文이 보이지만, 그 유역을 고조선 영토라고 할 수 없을뿐더러 箕侯 銘文은 산둥과 山西에서 더 많이 발견되었고 카줘는 商周 교체기에 孤竹國이었으므로 周代 燕國과 국경을 접하고 그곳을 통해 중원과 왕래를 했다고 해야지 箕子朝鮮이 될 수는 없다. 더군다나 箕子朝鮮의 위치는 한반도 이북 대동강인데 이곳에서 갑골문도, 商式 청동 유물도 보이지 않고 箕子朝鮮은 先秦 문헌에는 기록이 없고 漢代 문헌에서부터 기록이 나타나 한반도 역사 시초를 중화사상에 편입시키려고 시도한 것 같다. 게다가 箕子는 周族 앞잡이로 史記集解에도 그의 무덤은 蒙県, 허난 商丘에 있다


지금까지 종합했듯 遼河 문명-훙산 문화는 한민족과 만주족 모두의 젖줄이다. 그러나 고대 한민족 시초는 遼東에서 그칠 수밖에 없어진다. 그저 그럴듯한 정황만으로 이 모든 것을 성급하게 고조선 자취로 가정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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