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탕成湯, 전근대 왕조 문명의 開祖
成湯은 대륙 역사상 공인된 최초 국가 商 왕조의 창업주다. 전래 문헌에서 湯의 시호는 天乙인데 商代 갑골문에서는 大乙(大에서 天으로 와전되었을 것이다), 成과 唐(商代에는 따로 불렸다가 周代부터 합쳐져 불렸고 唐은 湯으로 와전됨), 咸, 高祖乙로 불린다. 한때 湯이란 왕의 치적이 갑골문에서는 번성기 祖로 기록되었다는 학계 견해를 믿고 商代 개국 시조를 大乙의 六代祖 上甲으로 앞당기고 싶어 했던 적이 있으나 이는 무리가 매우 크며 전래 문헌에서 전해지듯이 갑골 제례와 맞추어도 成湯이 商代 개국 시조가 맞는 것 같다
이번 글은 먼저 이에 대해 전제를 두면서 시작한다
갑골 卜辞에는 을미일에 上甲에서부터 祖乙과 羌甲에 이르기까지 제사를 올린 기록이 있는데 제수품이 上甲에게는 10개가 바쳐졌지만 報乙부터 示癸까지는 3개만이 바쳐졌고 大乙부터 祖乙까지 직계 先王에게는 10개, 방계에는 3개만이 바쳐졌다. 비록 제례 갑골은 이것이 다가 아니지만 大乙 앞 六示도 商 왕실 직계 조상인데 上甲을 제외한 나머지에게는 제수품이 3개만 바쳐졌다는 데서, 묘호 십간이 너무 순차대로 정해져 인위로 나열되었을 것이란 데서 이 六示까지는 왕조 전 先公에 속한다
또한 大乙은 갑골문에서 高祖라고 불렸는데 商代 제례에 따르면 父王과 그 형제는 모두 父, 할아비 이상 先王부터는 모두 祖라고도 했다. 갑골문에는 帝乙을 제외하고 高祖乙과 中宗 祖乙(下乙로도 불린다) 아래로 小祖乙(小乙), 武祖乙과 后祖乙(武乙, 갑골문 后는 後로도 쓰임)이 보이는데 小祖, 武祖 등을 존호로 이해해서는 아니 되며 여러 祖乙을 구분 짓기 위해, 康丁을 康祖丁으로도 부르듯 祖는 묘호 사이에 수식어로 쓰였다
다만 高祖乙 高祖는 존호로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은데 高祖乙은 高乙이 아니라 大乙이기 때문이다. 물론 갑골문 高祖가 최고 조상신 뜻으로 夒(또는 夔), 王亥에게도 바쳐졌고 이들은 말 그대로 조상 신앙으로 초월의 존재를 왕실과 잇기 위해 명명되었지만 大乙은 初代 商王이란 데서, 高祖가 후대 왕조 창업주 묘호로도 바쳐졌다는 데서 미루어보건대 高祖乙 高祖는 존호로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卜辞에는 고문헌에도 기록된 공적이 큰, 왕조 중반기까지 先王 大乙(高祖)-大甲(太宗)-祖乙(中宗)을 함께 제사한 기록도 있는데 上甲이 왕조 창업주 및 先王이었다면 大乙 앞에 上甲도 제사가 지내져야지 그러지 못했고 高祖로도 불리지 않았다
따라서 商朝 창업의 主는 전래 문헌에서 전해지듯 大乙이 맞다
다만 上甲을 商 왕실 시조로는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商代 先公先王 첫머리로 그 전 先公들은 商 왕실과 혈연상 조상이 아니라 연맹 씨족들 신앙에서 가져와 나중에 제례 대상에서 없어졌다는 데서, 上甲에서부터 商代 先王 시호 십간이 들어간다는 데서, 示壬과 示癸에서부터는 先王 배우자 先妣에게도 제사가 지내졌다는 데서 上甲을 商 왕실 開祖라고 할 수 있다
전래 문헌에는 商族이 무역을 하다가 有易과 마찰을 빚고 소와 재물을 빼앗기자 上甲이 有易을 멸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가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인류는 이미 先史 시대부터 부족을 이루어 흔히 전쟁을 했고 가장 강한 부족이 국가를 이루었다는 데서 신빙성은 높다. 그는 그렇게 왕조 창업으로 이어질 기반을 마련했고 商代 왕실 법도도 이미 大乙 앞 六示로부터 마련되었을 것이고 七廟도 이 六示가 기원일 것이다
왕실 시조인 만큼, 그 뒤 세 선조 신위는 匚에 안치되었지만 上甲의 신위(+)는 □ 안에 고이 안치되어 그의 묘호로부터 甲자가 완성되었고 祖甲 시대에 제례가 개혁되면서 商 왕실 최고 조상신이 되었다
그 뒤 成湯은 亳(오늘날 허난 옌스)에 商 왕실의 첫 도읍을 정하고 그곳에서 伊尹을 얻고 右尹으로 삼아 그의 도움으로 왕궁과 도시를 세우고 나라의 법과 관직을 마련했고 仲虺를 左尹으로 삼고 그를 비롯해 주변 方族들을 商 왕실 우방으로 끌어들이며 마침내 왕조를 완성, 즉 건국하였다. 商代 개국 연도를 학계에서는 기원전 1600년으로 정했지만 商湯이 夏朝와 桀을 멸한 공적은 갑골문 어디에도 없을뿐더러 商族은 과거 어느 누구도 섬긴 적이 없어 夏 왕조의 존재는 오늘날 부정되므로 商代 개국 연도를 20여 년 앞당겨 기원전 17세기 末로 다시 정할 수 있겠다
史記 殷本紀에는 伊尹이 노예 출신으로 전해지지만, 당시는 철저히 혈연이 강조되었듯 그도 원래는 黄帝의 간부 力牧 집안 후손으로 전해지고 商 왕조는 商 왕실 우방 方族들과 여러 邑(당시는 도시국가 및 제후)의 연맹으로 이루어져서 그들의 영향력이 강해 先臣들이 제후를 역임하며 중앙 왕실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었다는 데서 伊尹 또한 주변 씨족 대표 출신일 가능성이 더 크다
仲虺의 虺자는 살모사를 뜻하므로 仲虺가 뱀 토템 씨족 대표 출신일 것을 암시하며 갑골문에도 뱀 모양에 제사한 것을 학자들은 그로 본다. 成湯은 仲虺의 협력을 받아 이웃한 方族들을 우방으로 끌어들였을 것이다
갑골문에서 商湯이 번성기 祖로 기록되었다는 학설은 商代에는 후대처럼 王朝와 같은 말을 몰라 갑골문에 그 같은 언어를 남기지 않았고 國도 단일 왕조를 뜻하지 않았기에 아마 학자들이 오인을 한 것 같다. 즉 이런 언어는 오늘날 관점이지 당대 관점이 아니다. 갑골문에는 그저 邑을 새로 세웠다는 구절만이 보인다
전래 문헌에서 湯이 덕망 높았다는 기록도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遠古 역사를 무턱대고 계몽군주주의 시대에 쓰인 문헌에 맞춰 이해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商代와 같은 遠古 시대에 百姓은 평민이 아니라 姓과 氏를 가질 수 있었던 귀족들을 뜻했고 그 시대에 하층민은 귀족층 재산 및 생산 수단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湯이 대륙 역사상 初代 왕조 창업주로, 명군이었을 것은 믿어 의심치 않지만 商代 풍습은 어느 세월에 갑자기 한 번에가 아니라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전통이 되어 이어져 내려왔을 것이므로 湯이라고 遠古 시대 정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尙書 商書 湯誓 편에 의하면 商軍은 湯에게 夏桀이 포악무도한 것은 그들이 관여할 바 아니라고 전했으나, 이에 湯은 정벌 전쟁이 天帝의 명을 받았음을 강조해 그를 따르면 큰 상을 내릴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처자까지 몰살할 것이라고 강압해 군을 전쟁에 동원했는데 이는 湯의 창업 전쟁이 온전히 湯(지배층)의 뜻이지 결코 민중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윤내현 商周史 인용)
다만 唐이 스스로 제물이 되어 오랜 가뭄 끝에 비를 구했다는 呂氏春秋 기록이 있는데 이는 신빙성이 비교적 높을 것 같다. 당대에는 가뭄이 심하면 끝끝내는 귀족층 대표 왕까지 제물로 바쳐졌기 때문이다
成湯이 군사력으로 공적을 세운 행적은 고문헌과 갑골문 기록에 모두 맞춰도 실제로 있었던 것 같다. 詩經 商頌에서 그는 武湯과 武王으로도 불리는데, 갑골문에서 그를 가리킨 成과 咸도 戊 또는 戌에서 파생되었고 이 字는 창 또는 도끼 모습에서 나왔으므로 成湯이 군사활동으로 공적을 이루었음을 나타낸다. 夏를 멸한 적은 없지만 갑골문 증언에 따라 成湯은 왕조를 완성하며 군사력으로 동으로는 夷, 서로는 羌과 氐를 누르고 약 6세기 商代 기본 강역을 확보했을 것이다
고문헌에는 대륙 역사 기록이 이미 창세 신화 속 三皇과 五帝 시대에서 시작하고 黄帝가 중화 문명 開祖로 전해지는데 이를 절대 역사로는 인정할 수 없고 고대인들 환상에 그친다. 물론 그 신화가 발굴된 고고자료 덕분에 아무런 근거 없이 허무맹랑하기만 하진 않음으로 밝혀졌다. 연구 결과 고대인의 환상은 그 과거 고고자료들로부터 기억되어 대대로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며 신격화에 이르렀음으로 증명되었으니 그 신화도 역사의 일부로는 받아들여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니 어디까지나 신화는 신화로 이해해야 한다
고문헌에 기록된 上古 적 왕조 문명도 원시사회에서 역사 시대 세습 왕조 및 국가가 이루어지는 과정이 잘 비유되었는데 山西 타오스와 창강 중류 스자허, 허난 왕청강 등은 아직 신석기시대임에도 문화 수준이 높아 초기 도시국가 꼴이 갖춰졌으므로 문헌 전승이 뒷받침되긴 한다. 그러나 이들 유적은 문자를 개발 못한 채 어느 세월에 갑자기 사라져 끝내 세습 왕조를 못 이루었고 얼리터우도 그리고 대륙 동해안 산둥 방면 다원커우와 룽산 문명 후신 청동기 웨스 문화도 商 왕조에 눌려 후대에 九夷란 기록으로 나타나듯 여러 작은 세력으로 분열되었다가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따라서 대륙 역사 문명 시초는 갑골문이란 문자 유물로 공인된 商代가 된다
전통 문헌에는 黄帝 시대 전후를 기준으로 이미 천자와 제후가 공존했고, 商代 창업의 主 成湯도 제후의 추대를 받아 천자가 되었다고 전해지지만 지금까지 정황으로 미루어보건대 成湯이 商 왕조를 창업하면서부터 역사 시대에 처음으로 제후니 분봉이니 하는 문물이 나타나 周代에 봉건제로 완성되었고 종묘 제도부터 전근대 관직과 신분제 및 노예제, 후대 왕조에서 제례에 따른 천자와 제후 계급 그리고 왕의 謚法도 成湯 시대에 이미 틀이 마련되었다(謚法은 商代에도 엄연히 있었겠지만 가령 직계 및 준 직계는 전기에는 大, 中, 小, 祖, 上, 下 등 그리고 후기에는 武, 文, 康 등이고 방계는 外, 南, 虎, 呂, 戔, 羌, 般 등으로 간략히 구분해 아직 형식은 완성되지 않았고 周代부터 완성되었다. 다만 몇몇 商王 존호, 즉 후대 왕조 묘호는 이미 商代부터 형식이 완성되었다)
물론 이도 추측에 불과하다. 갑골문은 商代 왕실 점복 기록이자 당대 現王 일상 기록이지 과거 역사 기록은 아니라는 데서 한계가 있고 절대다수도 은허에서 발견되었다. 따라서 商史는 적어도 般庚 시대 전까지는 아직도 베일에 싸였다. 그러나 그 갑골문이란 문자 유물 덕분에 동북아 최초 국가 및 初代 왕조 商代 창업의 主 成湯의 실존이 증명되면서 그를 실존했던 전근대 왕조 문명 開祖로 공인할 수 있겠으며 商代에 商 왕실이 주변 민족을 정복하는 한편 포용하여 그들 문물을 수입해 당대에 찬란한 문명을 이루었다는 데서 중화 문명 開祖 黄帝 신화와, 그가 고대 부락 연맹을 이룬 전승이 완성되었을 것이다